무협 없는 무협영화? 허우 감독의 ‘자객 섭은낭’에선…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10일 20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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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권 감독들에게 무협영화는 어떤 관문, 혹은 통과의례인 듯하다. 리안(李安) 감독은 할리우드에서 자리를 잡은 뒤 ‘와호장룡’(2000년)을 내놨고,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의 필모그래피에는 ‘동사서독’(1994년) ‘일대종사’(2013년)가 있다. 장이머우(張藝謀) 감독 역시 ‘영웅’(2002년) ‘연인’(2004년)을 잇달아 연출했다. 일정한 경지에 다다른 고수가 자신을 시험하는 폐관수련(외부와 연락을 끊고 수련하는 것) 뒤에 내놓는 성취인 셈이다.

4일 개봉한 ‘자객 섭은낭’(12세 이상)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손꼽히는 허우샤오셴(侯孝賢) 감독이 8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자 그의 첫 번째 무협영화다. ‘비정성시’ ‘밀레니엄 맘보’ 등에서 보통 사람의 평범한 이야기로 관객을 사로잡은 그가 중국 당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한 전기(傳奇)소설의 주인공, 여성 자객 섭은낭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들었다.

“무협영화를 오랫동안 해오고 싶었지만 내 현실주의적 면모 때문에 어려웠다”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무협의 줄거리를 가졌지만 무협 같지 않다. 주인공 은낭(수치)부터가 그렇다. 어릴 적 고관의 아들 계안(장첸)과 정혼했던 은낭은 가문의 이해관계에 휘말려 파혼당하고, 열 살을 갓 넘긴 나이에 부모의 손을 떠나 여도사의 손에서 자객으로 키워진다. 은낭이 13년 동안의 수련을 마치고도 인정(人情)에 휘말려 임무를 그르치자 여도사는 아버지를 이어 고위직에 오른 계안을 암살하라며 은낭을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전형적인 무협지 주인공처럼 숙명을 지고 사는 인물이지만, 은낭은 복수심에 불타는 ‘일대종사’의 궁이나, 강호의 고수가 되려는 욕망에 몸부림치는 ‘와호장룡’의 옥교룡과는 다르다. 은낭은 누구든 일격에 제압할 수 있는 무공을 지니고도 끊임없이 망설인다. 인정에 이끌리는 은낭의 모습은 언뜻 우유부단해 보이지만, 결국 그 덕분에 운명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경지로 나아간다.

‘와호장룡’은 세련되고 화려한 경공으로 무협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고, ‘일대종사’는 빽빽하게 계산된 권법 대결로 중국 영화계에 축적된 무협 액션의 연출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허우 감독은 마치 주인공 은낭처럼 ‘현실적인 무협영화’라는 이율배반적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덜어내고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무협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인공의 무공 수련 장면은 이 영화에서 생략됐다. 은낭과 적수들과의 대결은 화려하기보다는 일도양단(一刀兩斷)에 가깝다. 결정적인 순간 카메라는 욕심을 버리고 멀어진 채 수풀 사이로 펄럭이는 붉은 옷깃과 번뜩이는 칼날만을 비춘다. 나뭇가지에 걸려 상대를 놓치는 무사의 뒷모습에서 허우 감독이 생각하는 무협 액션의 세계를 짐작할 수 있다.

대신 영화는 풍경에 귀 기울이게 하며 덜어낸 자리를 채웠다. 산수화를 보고 그대로 그려냈다고 해도 믿을 만한 영화 속 절경은 이 무협 없는 무협영화를 완성한다. 여도사가 머무는 깎아지른 절벽이나 흑백의 가지가 빽빽한 자작나무 숲, 부상당한 은낭이 몸을 의탁하는 시골 농가는 중국 곳곳에서 찾아낸 실제 풍경이다. 시대를 반영한 섬세한 의상이나 소품과 함께 영화에 들인 공을 짐작케 한다. 오랫동안 웅크렸다 일격에 상대를 제거하는 은낭의 단검처럼, 허우 감독이 8년 동안의 수련 끝에 내놓은 ‘자객 섭은낭’은 관객의 심장을 은연중에 벤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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