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사각’ 외국 IT업체… 국내 대리인制 도입해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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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기업 역차별 논란 커져
음란 동영상-접속경로 논란에도 법적 대리인 없어 제재에 구멍
유럽선 지정 대리인 통해 규제… “이용자 보호할 법적 장치 절실”


#1. 미국의 동영상 서비스 업체 ‘텀블러’는 음란 동영상의 온상으로 유명하다.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시정 요구를 받은 게시물 16만2793건 중 절반에 육박하는 7만9425건이 텀블러를 통해 유통됐다. 방통위는 텀블러 측에 음란물 삭제와 ‘자율심의협력 시스템’ 참여 등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텀블러로부터 “우리는 미국 법의 규제를 받는 미국 회사이고, 성인 콘텐츠는 우리 회사 정책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답만 돌아왔다. 텀블러는 국내에 따로 사무소를 두고 있지 않은 데다 법적 대리인도 없어 마땅한 제재 수단도 없는 상태다.

#2. 페이스북은 2016년 말부터 지난해 초까지 접속 경로를 임의로 변경해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 망을 통해 페이스북에 접속하는 이용자의 접속 속도를 떨어뜨렸다. 방통위는 조사 과정에서 페이스북코리아에 자료 제출을 요구했지만 페이스북코리아 측은 본사로 책임을 넘겼다. 결국 방통위는 오랜 시간을 들여 미국 본사와 홍콩 담당자에 대한 조사를 한 뒤 올해 3월에야 페이스북 본사를 대상으로 과징금 3억9600만 원을 부과했다. 하지만 페이스북 측은 이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냈고, 현재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해외 정보기술(IT) 기업들이 국내에 미치는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지만 국내에 법적 대리인을 두도록 하는 제도가 없어 규제 당국의 행정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있다. 국내 업체들과의 역(逆)차별을 막기 위해 국내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는 본사와 한국 정부를 연결할 대리인을 두도록 하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0일 방통위에 따르면 미국 동영상 스트리밍 업체 넷플릭스의 데이비드 하이먼 고문변호사가 당초 이달 21일 방통위를 방문하기로 했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방문할 수 없게 됐다고 18일 오후가 돼서야 통보해왔다. 하이먼 변호사는 최근 넷플릭스가 국내 진출을 확대하면서 국내 방송·미디어 업체들의 우려가 커지자 이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올 예정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넷플릭스 측은 “지속적으로 각 부처의 필요에 귀 기울이고 성실히 논의에 임하겠다”며 “추후 방통위와 다시 논의를 진행할 기회를 모색하겠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결국 우리 당국은 언제 올지도 모를 넷플릭스 본사 임원을 다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전문가들은 넷플릭스의 국내 대리인이 있었다면 본사 임원을 기다릴 필요 없이 대리인과 상의하면 해결될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페이스북이나 구글 등 대형 글로벌 업체들도 국내에 ‘페이스북코리아’ ‘구글코리아’ 등 지사를 두고 있긴 하지만 본사 대리인 역할은 하지 않고 있다. 법적으로 국내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체는 이들이 아니라 해외 본사로 돼 있고, 이들은 홍보와 마케팅, 영업 등 수탁받은 제한된 분야의 업무만 할 수 있다. 제재나 벌금 부과의 기준이 되는 국내 매출 등의 정보를 본사 협조 없이는 한국 정부가 확보하기 힘들다.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는 유럽은 본격적으로 해외 업체에 대한 규제에 나서고 있다. 독일 연방의회는 지난해 6월 혐오 표현을 담은 게시물, 영상 등을 24시간 내에 삭제하지 않으면 해당 업체에 최대 5000만 유로(약 650억 원)의 벌금을 부과하는 처벌법안을 통과시켰다. 유럽연합(EU)은 스트리밍 사업자에 콘텐츠의 최소 20%를 유럽 콘텐츠로 유지하도록 의무화했다. 특히 EU가 지난달부터 개인정보 보호를 강화하기 위해 시행한 ‘일반 정보 보호 규정(GDPR)’에서 해외 사업자에 대한 국내 지정대리인 제도를 의무화해 이를 따르지 않으면 과태료를 부과할 방침이다.

국내에서는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비례대표) 등이 국내 대리인 지정 의무화 법안을 발의했지만 아직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IT 업계 관계자는 “국내 이용자들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서비스에 당국이 행정력을 가할 수 없는 것은 문제”라며 “이용자 보호를 위해서라도 해외 업체가 한국에서 법적 책임을 지도록 하는 장치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김성규 기자 sunggyu@donga.com
#it#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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