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고용부 장관이 기업비밀 좌지우지?…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 논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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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승인 난 화학물질 핵심 성분… 장관이 취소 뒤 공개할 수 있게’
고용노동부, 2월 입법예고… 경영계-학계 “과도한 규제” 지적


반도체 업체 등이 사용하는 화학물질의 핵심 성분을 영업 비밀로 승인받았더라도 고용노동부 장관이 이를 취소하고 공개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정부가 추진해 논란을 빚고 있다. 경영계는 “고용부가 영업 비밀을 사실상 좌지우지하는 법안”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특히 과거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문위원실은 사실상 같은 내용의 법안에 부정적 의견을 밝힌 것으로 18일 확인됐다. 국회가 전문가 의견을 수렴한 뒤 폐기한 법안을 새 정부가 무리하게 재추진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당시 폐기된 법안은 김영주 고용부 장관이 국회의원 시절 대표 발의한 것이다.

고용부가 2월 입법 예고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 115조는 △거짓이나 부정한 방법으로 승인을 받은 경우 △새로운 유해성, 위험성 정보가 발견돼 근로자에게 중대한 건강 장해를 초래할 우려가 있는 화학물질로 확인된 경우 고용부 장관이 직권으로 ‘영업 비밀’ 승인을 취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기업의 영업 비밀이라고 하더라도 이 두 가지 요건에 해당하면 고용부 장관이 승인을 취소하고 외부에 공개할 수 있는 것이다.

개정안은 물질안전보건자료(MSDS)에 대한 사전심사제 도입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MSDS는 화학물질을 제조하거나 수입하는 업자가 제품 이름과 성분 명칭, 유해성과 위험성 등을 기재한 문서다. 화학물질 제조·수입업자는 모든 화학물질을 MSDS에 기재해 사업장에 둬야 한다. 기존에는 업자의 재량에 따라 영업 비밀로 보호해야 할 물질은 MSDS에 기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개정안이 통과되면 고용부의 승인이 있어야만 영업 비밀로 보호받는다.

또 영업 비밀 승인을 받았더라도 만약 근로자에게 위험한 요소가 새로 발견되면 MSDS에 기재해야 한다. 고용부 장관은 직권으로 영업 비밀 승인을 취소하고 제3자에게 이를 공개할 수도 있다. 정부 개정안 중 영업 비밀 승인의 유효기간을 3년으로 제한한 점도 쟁점이다. 재심사에서 떨어지면 영업 비밀로 보호받을 수 없고 MSDS에 기재해야 한다.

결국 기업 입장에선 공정의 핵심 재료를 영업 비밀로 보호받을 여지가 상당히 줄어드는 셈이다. 재계에선 개정안이 시행되면 핵심 재료와 성분의 공개를 원치 않는 외국 기업들이 부품 공급을 꺼릴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정부 개정안은 김영주 장관이 국회의원 시절인 2015년 10월 대표 발의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과 내용이 거의 같다. 당시 국회 환노위 전문위원실은 “MSDS의 1차적인 생산, 보존, 관리 주체는 사업주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며 공개 주체를 고용부 장관으로 한 데 부정적 의견을 냈다.

또 환노위 전문위원실은 고용부가 영업 비밀 여부를 사전 심사하는 데 대해 “국내에 유통되는 MSDS 물질이 수십만 개에 이르는데, 이를 (모두) 심의하는 것이 행정적 기술적으로 실현 가능한지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고용부가 그 많은 MSDS를 심사할 역량이 있을지 의심스럽다는 취지다. 이 때문에 해당 법안은 환노위조차 통과하지 못한 채 폐기됐다. 경영계의 한 관계자는 “의원 시절 추진했다 폐기된 법안을 장관이 돼 다시 추진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꼬집었다.

학계도 정부 개정안의 역효과를 우려하고 있다. 정진우 한국안전학회 정책부문장은 이날 한국경영자총협회 주최로 열린 산업안전보건정책 개선 토론회에서 “모든 화학물질의 명칭, 함유량 정보를 정부에 제출하도록 하는 것은 과도한 규제”라며 “선진국 중 정부에 MSDS 제출을 의무화한 나라는 없다”고 지적했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기업비밀#산업안전보건법#영업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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