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은행권 고졸 채용’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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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시중銀, 3년새 절반이하로 급감… 기보-수출입銀은 작년 1명도 안뽑아
“핀테크로 창구 직원 점차 감소… 고졸-대졸 구분 않는 전형도 한몫”
전문가 “특성화고, 맞춤교육 도입을”


국내 은행권에서 ‘고졸 신화’가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시중은행들이 고졸 채용 전형을 잇달아 없애거나 채용 인원을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의 특성화고 활성화 정책에 힘입어 고졸자를 많이 뽑았던 은행들이 정부가 바뀌면서 슬그머니 전형을 없애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정부의 방침보다는 비대면 거래 활성화, 블라인드 채용 확대와 같은 금융산업의 구조적인 변화 속에 은행권 채용 방식도 바뀌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 “고졸, 대졸 구분 없이 채용”

20일 은행권에 따르면 올 들어 KEB하나, IBK기업, NH농협 등 주요 은행이 특성화고 채용 전형 폐지를 검토하고 있다. 이미 신한은행은 지난해부터 별도의 고졸 채용 전형을 실시하지 않고 있다.

대신에 이 은행들은 학력 연령 전공 등의 스펙을 보지 않는 ‘블라인드 채용’ 방식에 따라 고졸자와 대졸자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전형으로 선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고졸자 대상의 별도 전형이 없어지면 자연스럽게 고졸 채용이 줄어들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고졸자가 대졸자와 똑같이 경쟁하면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은행권의 고졸 채용 규모는 해가 갈수록 줄고 있다. KB국민, 신한, KEB하나, 우리 등 4대 시중은행의 고졸 전형 채용 인원은 2014년 339명에서 지난해 129명으로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기업은행도 매년 70명 가까이 특성화고 전형으로 채용했지만 지난해는 40명만 뽑았다.

금융 공기업도 마찬가지다. 기술보증기금, 한국수출입은행은 2013년 이후 처음으로 지난해 고졸 정규 직원을 1명도 뽑지 않았다. KDB산업은행은 2013년 55명을 뽑았지만 지난해엔 5명에 불과했다. 신용보증기금(4명), 예금보험공사(2명), 주택금융공사(4명), 자산관리공사(8명)도 지난해 고졸 채용 인원이 최근 5년 새 가장 적었다.

○ “산업구조 변화, 블라인드 채용 영향”

이런 추세는 고졸 채용을 강조하는 정부의 독려가 없어진 탓도 있지만 금융산업의 구조적인 변화가 주된 원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우선 모바일뱅킹, 인터넷뱅킹 등 비대면 거래가 금융 거래의 90%에 이르는 상황에서 고졸 직원들이 주로 일하는 ‘텔러(영업점 창구 직원)’ 자체가 줄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8개 시중은행 영업점은 5643개로 5년 새 약 900개가 없어졌다. 한 시중은행 지점장은 “이제 창구 직원도 단순 출납 업무보다는 자산관리 상담 등 고차원적 업무를 맡아야 한다”며 “특성화고 졸업자들이 이런 새로운 흐름에 맞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블라인드 채용 모델이 확산되는 것도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은행권이 최근 공동으로 마련한 ‘은행권 채용 절차 모범규준’은 학력에 대한 차별을 전면 금지하고 있다.

은행권은 고졸 신화가 가장 많이 탄생한 화이트칼라 직업군이다. 텔러에서 출발해 고위직까지 오른 사례가 심심찮게 나왔다. 함영주 하나은행장,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 이백순 전 신한은행장 등 고졸 출신 최고경영자(CEO)가 다른 업종보다 많았다.

하지만 채용 감소에 따라 더 이상 은행권 고졸 신화를 보기 힘들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런 움직임을 바라보는 특성화고 ‘예비 취준생’은 착잡하다. 서울 소재 특성화고 2학년 최모 양(17)은 “은행원을 꿈꾸며 입학했지만 이제라도 방향을 바꿔 대입을 준비해야 할지 고민된다”고 말했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
#고졸#채용#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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