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아파서 재택근무 합니다”…스웨덴에선 당연, 한국이라면?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23일 16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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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아이가 열이 나요. 학교에 못 보내겠어. 감기가 심한 거 같아.”

“잠시만. 당신은 오전에 회의가 있죠? 내가 바로 회사에 전화할게요.”

스웨덴 스톡홀름 남서쪽 툴링에(Tullinge)에 거주하는 아사 플로드마크 씨(39·여), 프레드릭 플로드마크 씨(37) 부부는 오전 9시까지 출근해야하는 맞벌이였지만 8살 난 초등학생 아들의 돌발 상황에서도 평온했다. 이 상황이 한국의 맞벌이 부부에게 닥쳤다면 어땠을까. 아마 급하게 아이를 돌봐줄 수 있는 친척이나 이웃을 수소문하느라 진땀을 빼거나 ‘멘붕’에 빠졌을 것이다. 선진국의 워라밸 제도와 문화를 찾아 나선 동아일보 특별취재팀이 지난해 11월 16일 찾은 스톡홀름 부부의 집에서는 아이 맡길 곳을 찾느라 조급해하는 분위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재택근무

이날 오전 아사 씨는 감기를 앓던 아들 욘 군(8)의 몸 상태가 학교에 가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자 별다른 고민 없이 직장 상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아이 때문에 재택근무를 합니다.”(아사 씨)

아사 씨는 “사무실에 가지 않고 집에서 일한다고 상사가 눈치를 주거나 회사로부터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사 씨는 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자신의 집 부엌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문서를 작성하며 틈틈이 욘을 돌봤다. 욘의 상태가 조금씩 호전되자 아사 씨는 욘이 자신의 옆에서 아이패드로 학습용 게임을 하도록 거들었다.

욘을 낳기 전까지 이들 부부는 ‘워라밸’이란 단어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워라밸은 일상에서 공기처럼 당연했기 때문이다. 오전 9시에 회사로 출근해 8시간가량 일하고 난 뒤에는 영화를 보거나 친구를 만나는 등 자유롭게 여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첫 아이인 욘과 둘째 마야(5·여)가 태어나면서부터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루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자녀들을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보낸 후에야 출근했다. 퇴근 후에 육아를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날처럼 근무시간에 아이가 아프게 되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 직원의 워라밸이 생산성 향상

이들의 워라밸을 지켜준 것은 ‘유연근무제’였다. 프레드릭 씨는 “회사가 어디에서 몇 시간 일했는지 보다 성과를 더 중요시한 덕분에 시간을 융통성 있게 조절해 근무도 하고 개인 용무도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들 부부가 일하는 스웨덴 트럭·버스 제조업체 스카니아(SCANIA)에는 ‘워라밸’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는 별도의 제도는 없다. 그럼에도 여러 제도가 워라밸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직원들의 건강을 위해 회사 건물에 체육관이 설치돼있다. 정신과 의사를 고용해 필요한 경우 심리치료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스웨덴의 많은 기업들이 ‘유연근무제’를 적극 활용한다. 직원들이 출퇴근 시간을 알아서 정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재택근무도 눈치 보지 않고 할 수 있다. 일주일에 40시간 근무가 원칙이지만 일이 많은 주에는 좀 더 일할 수 있다. 대신 덜 바쁜 때에 적게 일할 수 있도록 했다. 스카니아 HR 담당자 소피아 발네 씨는 “상사가 직원들과 계속 소통하면서 어떤 업무 환경이 불만족스럽고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파악한다”며 “개인의 삶을 희생하지 않고도 일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직원들의 복지와 기업의 생산성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됐다는 인식이 스웨덴 사회 전체에 환산돼 있었다. 현지에서 만난 아이린 베네보 스웨덴 고용노동부 차관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스웨덴 고용주들은 법을 어기거나 사회 가치에 역행하는 이미지를 받게 되면 인재를 모으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며 “이 때문에 기업이 적극적으로 직원들의 워라밸을 잘 지켜주려 한다”라고 말했다.

● 성평등 문화로 워라밸 공고

스웨덴 성평등 문화는 워라밸 실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스웨덴인들은 가사노동과 육아에서 공평하게 역할분담을 해 부부 모두 워라밸을 실현하려 노력한다. 실제로 세계경제포럼(WEF)에 따르면 지난해 스웨덴은 149개국 중 세 번째로 젠더 격차(성평등 수준)가 작다. 반면 한국은 115위에 그쳤다.

같은 달 12일 기자는 말뫼의 프리다 스벤슨 씨(33·여), 데이빗 요한슨 씨(36) 부부의 집을 방문했다. 데이빗 씨가 딸 에스트리드 양(4)에게 옷을 입히며 유치원에 데려다 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딸의 등원은 늘 데이빗 씨가 맡는다. 프리다 씨보다 30분 늦게 출근을 해 아침에 여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들 부부는 철저히 가사를 분담한다.

에스트리드 양의 하원과 저녁식사 준비는 남편보다 두 시간 일찍 퇴근하는 프리다 씨가 맡았다. 오후 6시경 귀가한 데이빗 씨는 프리다 씨가 준비한 저녁을 빠르게 먹었다. 이어 에스트리드 양과 블록 쌓기를 했다. 책을 읽어주며 딸을 재우는 것도 그의 몫이다.

“어릴 적 내 어머니는 직장생활과 가사를 둘 다 하다가 결국 일을 그만 두고 전업주부가 되셨죠. 나 홀로 가사를 도맡았다면 워라밸은 커녕 일을 하는 것조차 꿈도 못 꿨을 거예요.”(프라다 씨)

에스트리드 양이 오후 8시 경 잠들자 데이빗 씨는 “아이가 태어나면서 부부의 여유 시간이 많이 줄었지만 역할 분담을 통해 효율적으로 가사 일을 마치려 한다”며 “부부가 보낼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는 게 워라밸”이라고 했다.

▼ 스웨덴 워라밸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실현될 수 있는 이유는? ▼

개개인의 인식 변화나 기업의 노력으로만 스웨덴 워라밸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밑바탕에는 근로자를 보호하고 육아부담을 줄여주려는 사회보장법과 노동법 등 다양한 정책이 있었다.

예를 들어 스웨덴에서는 근무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은 ‘근로자’가 가진다. 스웨덴 노동법 상 법정 주당 근로시간은 기본적으로 40시간이지만 근로자가 판단했을 때 일이 많은 주에는 자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번 주는 50시간을 일하고 그 다음주는 30시간만 일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런 결정을 고용주가 근로자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또 연장근무는 연 200시간을 넘어서면 안 된다.

과거 스웨덴에서 이뤄졌던 세 가지 개혁은 워라밸 실현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리아 안홀름 자유당 당비서(원내대표)이자 전 성평등 장관은 △부부 분리 과세 △육아휴직 △공공보육서비스가 스웨덴 워라밸 정착의 공신으로 꼽았다.

스웨덴은 맞벌이 부부의 소득은 합산해 누진적으로 소득을 매겼다. 하지만 1971년 ‘부부 분리 과세’ 제도가 도입돼 맞벌이 부부의 감세효과가 커지면서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었다. 또 스웨덴에서는 아이 1명 당 총 480일의 육아휴직 중 90일은 아버지가 사용하지 않으면 자동 소멸되도록 해 남성육아휴직을 활성화시켰다. 공립 유치원을 통해 고품질 교육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한다. 안홀름 전 장관은 “세 가지 개혁은 육아 부담을 줄이고 부모 개인의 삶을 존중하는 게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은 어떤 점이 보완돼야 워라밸이 실현될까. 전문가들도 유연근무제가 워라밸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유연근무제를 확산되기 위해서는 고용주와 근로자 모두 서로 신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국민대 행정정책학부 조경호 교수는 “한국은 위계가 강하다”며 “조직 문화가 유연해지고, 조직 구조가 직무 중심이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정책학과 금현섭 교수는 “육아 문제가 여성에게 전가된 채 여성만 유연근무제를 활용하게 되면 오히려 유연근무제를 지속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며 “남성도 유연근무제를 이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톡홀름·말뫼=김하경기자 whats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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