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 칼럼]금 가고 물 새는 유아독존 정책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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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문제 놓고 관점 따라 선택 달라지는 심리학 실험
정책판단 한 면만 봐선 안돼
편향된 대기업·소득성장 정책… 실패 자인하고 방향 전환해야
‘나만 옳다’ 정책 피해자는 국민

박제균 논설실장
박제균 논설실장
첫 번째 질문. 어떤 마을에 600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 그런데 무서운 질병이 발생해 마을 사람 모두를 죽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대응하는 두 가지 치료 프로그램이 있다. 두 프로그램의 예상 결과는 다음과 같다. ①프로그램 A: 200명을 살릴 수 있다. ②프로그램 B: 33%의 확률로 600명을 구하고, 67%의 확률로 아무도 살리지 못한다. 자, 당신이 질병관리본부 책임자라면 둘 중에 어떤 프로그램을 선택할 것인가?

두 번째 질문. 그 마을에 주어진 상황은 똑같다. 다만 이번에는 이런 치료 프로그램이다. ①프로그램 A: 400명이 죽는다. ②프로그램 B: 33%의 확률로 아무도 죽지 않고, 67%의 확률로 600명이 죽는다. 이번엔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미국 프린스턴대 심리학과 대니얼 카너먼 교수가 실시한, 심리학사에 길이 남을 실험 중 하나다. 실험 참가자들은 첫 번째 질문에서는 대다수가 프로그램 A를 택했다. 두 번째 질문에서는 프로그램 B를 훨씬 선호했다. 그런데 따져보면 첫 번째와 두 번째 물음에서 프로그램 A와 B는 같은 내용이다. 600명의 사람 중 200명이 사는 것과 400명이 죽는 것은 결국 같은 뜻이다. 다만 전자는 ‘살린다’는 관점으로, 후자는 ‘죽는다’는 관점으로 표현한 것. 같은 문제와 상황에서도 관점이 달라지면 인간의 판단과 선택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험이다.(‘지혜의 심리학’, 김경일)

이 실험을 보면 인간의 판단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알 수 있다. 보다 적확한 판단을 하려면 문제의 양면성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도 실험이 주는 교훈이다. 설명이 길어진 것은 문재인 정부를 이끄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문제나 상황, 사물이나 사건의 한 면만 보고 선택과 판단을 하는 경향이 너무 짙다.

대표적인 것이 대기업을 보는 관점이다. 대기업이 하청업체와 중소기업을 착취해 성장한 측면이 있다면 그 성장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한국경제에 기여한 다른 면이 있다. 오너 경영체제도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 세습을 유지해온 어두운 면이 있다면 오너의 책임 있는 결단이 기업 경쟁력을 높이는 밝은 면이 있다. 그런데 이 정부의 경제 실권자들은 한쪽 면만 보고, 아니 다른 면은 아예 보지 않으려 하면서 정책을 밀어붙인다.

대기업 정책의 제1 타깃은 물론 재계 1위인 삼성이다. 하지만 2위인 현대차를 비롯해 다른 대기업을 보는 시각도 같다. 현대차 고위 임원이 사석에서 한 장관에게 수소전기차에 대한 규제 완화를 요청했다. 그러자 장관은 정색을 하고 “그러면 현대차만 좋아지는 것 아니에요”라고 쏘아붙였다고 한다. 다른 장관은 현대차 고위직 앞에서 “환경오염의 주범은 현대차”라고 지목했다. 장관이라는 사람들의 인식 수준이 이렇다.

이미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인 J노믹스에 균열이 생기고 물이 새기 시작했다. 역시 한 면만 보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말만 성장정책이지, 기실 분배정책이다. 세계 어디서도 성장이 검증되지 않은 정책이다. 문 대통령이 최근 들어 혁신성장과 그 엔진인 규제개혁을 유난히 강조하는 것도 어쩌면 이 정책의 실패를 예감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실패를 자인하고 정책 전환을 해야 한다. 진보좌파 시민단체와 지식인 집단, 노동계의 저항도 있겠지만 그걸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문 대통령의 성패가 달렸다. 무릇 정권의 위기는 경직성의 위기에서 비롯된다.

정책에 대못을 박으려는 이 정부 사람들을 보면 고대 그리스의 리쿠르고스가 생각난다. 기원전 8세기 도시국가 스파르타의 권력자다. 그는 전사(戰士)들의 병영사회를 이상으로 삼고 각종 제도를 밀어붙였다. 가령 스무 살 성인식에 하층민을 습격해 살해하고 머리를 가져오는 의무를 포함시킬 정도였다. 제도가 정착된 뒤 그는 스파르타를 떠나며 시민들에게 이렇게 요구했다. “내가 귀국할 때까지 절대 바꾸지 않겠다고 서약해 달라.” 당연히 모두 서약했다. 그는 외국을 떠돌며 죽을 때까지 일부러 귀국하지 않았다. 대못박기도 이런 대못박기가 없다. 그 결과 스파르타는 많은 그리스 도시국가가 남긴 문명과 민주주의, 문화 예술 어떤 것도 역사에 남기지 못했다. ‘나만 옳다’는 유아독존(唯我獨尊) 정책의 사회적 비용을 치르는 사람들은 정책 결정·집행자가 아닌 국민이다.
 
박제균 논설실장 phark@donga.com
#대기업 정책#문재인 정부#유아독존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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