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폄하한 日帝… 이토 죽기 전 “어리석은 녀석” 발언은 조작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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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26일 安의사 서거 109주기

하얼빈 의거 기리는 사진엽서-노래 안중근 의사는 항일과 동양 평화의 아이콘이었다. 1. 왼쪽 무명지 한 마디를 끊어 대한 조국 광복에 헌신을 맹서한 안 의사의 손도장. 2.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기념 사진엽서. ‘대한의사 안중근공’이라는 설명 아래 안 의사와 권총 사진, 하얼빈역의 이토 히로부미 사진을 실었다. 3. 안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동생들에게 유언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엽서. “나 죽은 후에 나의 시체는 우리나라를 회복하기 전에 반장(고향으로 이장)하지 말라”고 적혀 있다. 4.
 1914년 최신창가집에 실린 ‘영웅모범가’. “안중근의 그 의기를 우리 모범하리라”는 가사를 담고 있다. 5. 일본 사회주의 
평화운동가 고토쿠 슈스이의 친필 추모 한시가 실린 안 의사 사진엽서. ‘샌프란시스코평민사’가 제작했다. 지식산업사·도진순 창원대 
교수 제공
하얼빈 의거 기리는 사진엽서-노래 안중근 의사는 항일과 동양 평화의 아이콘이었다. 1. 왼쪽 무명지 한 마디를 끊어 대한 조국 광복에 헌신을 맹서한 안 의사의 손도장. 2.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기념 사진엽서. ‘대한의사 안중근공’이라는 설명 아래 안 의사와 권총 사진, 하얼빈역의 이토 히로부미 사진을 실었다. 3. 안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동생들에게 유언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엽서. “나 죽은 후에 나의 시체는 우리나라를 회복하기 전에 반장(고향으로 이장)하지 말라”고 적혀 있다. 4. 1914년 최신창가집에 실린 ‘영웅모범가’. “안중근의 그 의기를 우리 모범하리라”는 가사를 담고 있다. 5. 일본 사회주의 평화운동가 고토쿠 슈스이의 친필 추모 한시가 실린 안 의사 사진엽서. ‘샌프란시스코평민사’가 제작했다. 지식산업사·도진순 창원대 교수 제공
“舍生取義(목숨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하고)/殺身成仁(자신을 죽여 인을 이루었네)/安君一擧(안중근의 의거에)/天地皆振(온 천지가 들썩이네).”

일본의 대표적 사회주의자이자 평화운동가인 고토쿠 슈스이(1871∼1911)가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며 쓴 한시다. 1910년 샌프란시스코평민사가 제작한 안 의사 사진엽서에 그의 친필로 실렸다.

26일 안 의사 서거 109주기를 앞두고 관련 연구가 잇따라 나왔다. 최근 발간된 ‘3·1독립만세운동과 식민지배체제’(지식산업사)에 실린 김봉진 일본 기타큐슈시립대 국제관계학과 교수의 논문 ‘안중근과 일본, 일본인’은 이토 히로부미가 죽기 전 ‘어리석은 녀석이다(馬鹿ナ奴ダ)’라고 말했다는 건 “조작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이 논문에서 이토의 수행원들 증언을 추적했다. 이토가 ‘범인은 한인’이라는 말을 듣고 ‘어리석은 녀석’ 운운했다는 일화는 수행원이었던 귀족원 의원 무로다 요시부미의 이야기에만 나온다. 1909년 11월 1일자 오사카마이니치 신문의 무로다 인터뷰 기사와 무로다가 12월 16일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한 증언이다. 그러나 다른 수행원의 증언이나 기사, 전문, 보고서에는 이런 얘기가 전혀 없다. 무로다가 1909년 11월 20일 시모노세키시 재판소에서 한 첫 번째 증언에도 없다.

그럼에도 이 말은 ‘이토 공 전집(伊藤公全集·1928년)’에 “‘한인 안중근’이라는 말을 듣고 한마디 했을 뿐”이라고 실리며 마치 사실인 것처럼 후대에 전해졌다.

김 교수는 “의거 당일 보고서에 들어있는 이토의 직속 비서관 후루야 히사쓰나의 증언이 신빙성이 높다”면서 “후루야는 이토가 죽은 지 약 1시간 15분 뒤에야 ‘범인은 한국인’임을 알게 됐다고 증언했다”고 설명했다. 현장을 목격한 러시아 대신 코코프체프의 증언 등으로 미뤄보면 이토는 치명상을 입고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로 의식을 잃은 채 객차로 옮겨졌다. 의거 다음 날 일본 신문도 이토의 즉사(卽死)를 전하는 전문을 보도했다.

한상일 국민대 명예교수는 저서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까치)에서 “이토의 죽음을 극화하고 병탄을 왜곡하기 위해 뒷날 만들어진 기록”이라며 “이토를 암살하는 ‘어리석은 짓’이 결국 한일병탄을 자초했다고 왜곡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제가 이처럼 안 의사를 폄하하고자 했던 이유는 안 의사가 ‘항일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중들은 안 의사를 숭모하며 뜻을 이어갔다.

김대호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최근 논문 ‘일제강점기 안중근에 대한 기억의 전승, 유통’에서 안 의사의 사진과 노래 등에 주목했다. 안 의사의 사진은 1909년 11월 초 처음 공개됐고, 사후 사진을 넣고 ‘충신 안중근’이라고 쓴 엽서 등이 불티나게 팔렸다. 일제의 강력한 단속에도 불구하고 사진엽서는 서시베리아와 북만주부터 미국 샌프란시스코까지 퍼져나갔다. 창가 ‘영웅모범가’나 ‘독립군가’ 역시 안 의사를 기렸다.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안 의사 사진에 관련된 일부 잘못된 해석을 바로잡았다. “몰골이 초췌하다”며 일제의 ‘안중근 비하물’이라는 주장이 나온 사진이 사실은 뤼순 감옥 초기 안중근의 모습을 증언하는 귀중한 사진이라는 것이다. 도 교수는 “일제는 오히려 안 의사를 인도적으로 대우하고 있다고 선전하고자 했다”며 “민족을 넘어 동양 평화를 모색한 안 의사의 이 사진은 고토쿠 슈스이가 간직했던 안중근 사진엽서의 모본”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안중근의사#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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