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했던 내 인생, 나눌수 있어 봄날”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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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째 기부 84세 강정숙 할머니
43세에 남편사별후 청소로 생계… 1000원짜리 재활용 옷 사입으며
학교-NGO-이웃엔 아낌없이 기부

20일 서울 서초구 푸른나무 청소년폭력예방재단 사무실에서 강정숙 할머니(왼쪽)가 김종기 청예단 명예이사장에게 손글씨로 쓴 편지를 주며 환하게 웃고 있다. 청예단 제공
20일 서울 서초구 푸른나무 청소년폭력예방재단 사무실에서 강정숙 할머니(왼쪽)가 김종기 청예단 명예이사장에게 손글씨로 쓴 편지를 주며 환하게 웃고 있다. 청예단 제공
“후원자라고 하기에는 민망하고 송구스럽습니다.”

강정숙 할머니(84)는 매달 받는 노인연금 25만 원 중 4만 원을 기부한다. 2만 원은 학교폭력예방 비정부기구(NGO) ‘푸른나무 청소년폭력예방재단(청예단)’에, 나머지 1만 원씩은 각각 대한적십자사와 ‘거창군 삶의 쉼터’에 자동이체로 전달한다. 20일 서울 서초구 청예단 사무실에서 만난 강 할머니는 직원들이 ‘기부천사 할머니 오셨다’며 반기자 “시골 노인네 뭐 볼 게 있느냐”며 손사래를 쳤다. 지난해 12월 청예단이 후원자들을 대상으로 연 ‘감사의 밤’ 행사에 참여한 이후 석 달만의 만남이었다.

강 할머니가 청예단과 인연을 맺은 건 지난해 8월이다. 한 방송에 출연한 김종기 명예이사장이 학교폭력으로 아들 대현이를 잃고도 꿋꿋이 공익활동을 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할머니는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걸어 월 2만 원 후원을 약속했다. “아들 이야기를 듣고 눈물로 시간을 보냈어.” 감사의 밤 행사에서 받은 야광팔찌는 할머니의 보물 1호다. 대현이가 준 선물 같기 때문이란다.

강 할머니의 기부 습관은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이다. 그는 “6·25전쟁 직후 거리의 걸인들에게 항상 따뜻한 밥을 나눠주는 어머니를 보며 자랐다”고 말했다. 강 할머니의 어머니는 “나눠야 잘산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걸인들은 “우리도 이제 굶어죽겠다”며 울먹였다.

강 할머니가 본격적으로 기부를 시작한 것은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들처럼 결혼해 6남매를 낳고 마흔 셋이 된 1978년, 야속하게도 하늘은 남편을 먼저 데려갔다.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는 거창군청과 경남거창도립대를 오가며 청소노동자로 일했다.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기부를 멈추지 않았다. 청소하고 받은 봉급이 단돈 6만 원이던 시절 동네 전문대에 기숙사를 짓는다는 소식에 5만 원을 선뜻 기부했다. 훗날 완성된 기숙사 ‘후원자 명단’에는 첫 번째 자리에 ‘강정숙’ 이름 석 자가 새겨졌다. “내 이름 석 자가 걸려 있더라고. 석 자가.” 벅찬 목소리가 떨리는 듯했다.

자신의 옷은 재활용센터에서 1000원 주고 사 입어도 나눌 수 있어 감사했다는 강 할머니는 가장 기억에 남는 기부로 30년 전 경운기 사고로 부모를 잃은 이웃집 4형제에게 냉장고를 사다 주고 쌀을 채워준 일을 꼽았다. 일곱 살 막내가 대학 갈 때까지 옷과 이불을 만들어 주며 엄마 노릇을 했다. 자식들에게 강 할머니는 ‘살아있는 교과서’다. 1남 5녀 중 넷째 아들인 이화종 씨(50)는 이달부터 어머니를 따라 청예단에 월 3만 원씩 후원하기로 했다.

강 할머니는 지금도 시간을 쪼개 거창 적십자병원에서 환자들을 위해 안내데스크에서 봉사를 한다. “뒤돌아보면 가난했던 내 인생은 나눌 수 있어 온종일 봄날과 같았어요.” 따스한 햇살처럼 강 할머니가 환하게 웃었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
#노인연금#청예단#40년째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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