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 안 하면 어용? ‘낡은 틀’ 깨야 대기업 노조에 미래 있다”

  • 주간동아
  • 입력 2019년 3월 23일 18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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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정묵 SK이노베이션 노조위원장
‘이상한’ 相生 노조… 30분 만에 임금 협상 합의하고 기본급 1% 협력사에 내놔

[지호영 기자]
[지호영 기자]
SK이노베이션 노동조합은 ‘이상한’ 노조다. 3년째 노사 간 분규 없이 임금 협상을 타결했고, 노사가 함께 협력사와 소외계층을 위한 기금을 적립, 매년 이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심지어 올해 임금 협상은 단 30분 만에 합의안이 도출됐다. 이러한 ‘속성’ 합의에 대한 조합원들의 지지도 두텁다. 적잖은 대기업 노조가 ‘귀족노조’로 지탄받고 있는 현실에 비춰보면 이례적인 현상이라 할 만하다.

3월 18일 이상한 노조를 이끌고 있는 이정묵(57) 위원장을 울산미포국가산업단지에 자리한 SK이노베이션 울산CLX(콤플렉스)에서 만났다. 이 위원장은 2017년 노조위원장에 취임한 뒤 임금인상률을 소비자물가상승률에 연동하고, 노사가 공동으로 상생기금을 조성하며, 조합원 자녀 우선채용 제도를 폐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노사 간 합의안을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 해고자 출신 노조위원장

자기 소개를 해달라.

“1988년 대한석유공사 시절 입사했다. NEP(New Ethylene Plant·나프타분해공장), FCC(Fluid Catalytic Cracking·중질유분해공장) 두 개 사업부에서 근무했다. 1994년 노조 민주화운동을 벌이다 주동자로 찍혀 1997년 해고됐다. 노조 집행부의 독선적 행위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이던 와중에 갑자기 서울 근무로 인사가 났다. 부당 노동 행위라며 출근을 거부하다 해고된 것이다. 중앙노동위원회에서 승소해 2001년 복직했다. 2008년 20대 노조위원장으로 당선됐고, 2017년 재선됐다. 소속은 SK에너지다.”(Tip 참조)

노동운동을 벌이다 해고됐던 사람이 상생노조를 이끈다?

“내 스펙을 보면 강성이라고 할 만하다.(웃음) 하지만 강성이란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안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지, 강성이라는 형식을 항상 고집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SK이노베이션 노사는 2017년 임금인상률을 전년도 소비자물가상승률에 연동시키기로 합의한다. 국내 기업 최초 사례다. 이후 2017년부터 올해까지 3년째 이 약속대로 임금인상을 해왔다. 이 회사의 임금인상률은 2017년 1%, 2018년 1.9%, 2019년 1.5%인데, 이는 통계청이 매년 초 발표하는 소비자물가상승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어떻게 ‘소비자물가 연동 임금인상’ 아이디어를 내게 됐나.

“노동운동을 하면 할수록 노동운동과 조합 활동은 별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운동이 옳지 않은 일과 관련해 권력에 맞서는 것이라면, 조합 활동은 노동자 권익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임금인상은 노동자 권익을 위한 조합 활동에 속한다. 굳이 회사와 대립하며 싸울 일이 아니다. 노사 간 임금인상에 관해 일정한 원칙을 정해놓는다면 소모전을 벌일 이유가 없지 않을까 싶었다. 노노(勞勞) 간 갈등을 해소하고, ‘노사 대립’을 ‘노사 신뢰’로 바꾸고도 싶었다. 그래서 2008년 노조위원장에 당선됐을 때 ‘임금인상 룰’을 정해보자고 회사 측에 제안했다. 하지만 전례가 없는 일이었고, 회사도 아직 생각해본 적이 없던 사안이라 교섭 안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곧 글로벌 금융위기가 왔고 흐지부지됐다.”

이후 10년 가까이 잠자던 ‘임금인상 룰’ 아이디어는 2017년 이 위원장이 노조위원장 재선에 나서면서 부활했다. 그는 이 사안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는데 이번에는 조합원들도, 회사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10년 만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전에는 SK이노베이션도 여타 대기업 노조와 다르지 않았다. 임금인상안을 놓고 노사가 치열하게 대립했다. 합의에 이르기까지 짧게는 3~4개월에서, 길게는 1년이 걸렸다. 그런데 그렇게 싸워서 얻은 결과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임금이 동결되는 때도 종종 있었고. 2016년에는 결국 교섭이 결렬돼 중앙노동위원회에 가서 조정을 받기도 했다. 잘 알려졌다시피 SK이노베이션의 임금 수준은 국내 대기업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한다. 직원들도 임금을 많이 올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많은 지수 가운데 소비자물가상승률을 택한 이유는.

“과거 10년 치 임금인상률을 분석했더니 연평균 임금상승률이 2.1%였다. 그런데 그 기간 평균 소비자물가상승률이 2.34%로 더 높았다. 따라서 임금인상률을 소비자물가상승률에 연동시키면 적정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협력사 직원 설 상여에 ‘정성’ 보태

그렇다면 회사는 왜 적자가 나도 임금을 인상해줘야 하는, 매출액이나 영업이익 등 경영 성과와 무관한 ‘임금인상 룰’을 수용했을까. 이에 대해 이강무 경영지원본부장은 “회사도 오래전부터 고정급 인상을 놓고 노조와 대립하는 것이 비합리적이고 비생산적이라 혁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왔다”며 “고정급은 정해진 원칙 아래 안정적으로 운영해가고, 경영 성과는 성과급에 반영하는 것이 회사 경영은 물론 발전적 노사관계에도 좋겠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 위원장은 “임금인상 원칙을 세워놔 무엇보다 좋은 점은 미래 임금 수준을 안정적으로 예측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라며 “이제는 새해가 되면 조합원들이 통계청이 전년도 소비자물가상승률을 얼마로 집계해 발표할지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고 말했다.

문성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은 SK이노베이션 홍보대사임을 자처한다. 이 회사의 노사가 ‘1% 행복나눔기금’이란 이름으로 함께 돈을 모아 협력사와 소외계층을 돕고 있는 것이 다른 기업들로 확산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지난해에는 울산에서 열린 기금 전달식에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은 과거 있었던 ‘1인 1후원계좌’를 확대한 것이다. SK이노베이션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매달 5000원, 1만 원씩 기부하던 것을 2017년부터 ‘기본급 1% 적립’ 방식으로 바꿨다. 직원이 기본급 1%를 기부하면 회사가 같은 금액을 기부하는 매칭 그랜트 방식으로 기금을 쌓는다. 직원이 낸 만큼 회사도 내는 것으로 방식을 바꿨더니 참여율이 30~40%에서 80%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3500여 명이 근무하는 울산CLX의 참여율은 98%에 이른다. 2017년 10월 기금 적립을 개시한 이래 지난해 말까지 27개월간 누적 기부금은 106억 원에 달한다.

상생기금은 어떻게 쓰이나.

“절반은 협력사에 전달하고, 나머지 절반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소외계층 지원, 사회적 기업 육성 등에 사용한다. 발달장애인 자립 지원, 소아암 환자 치료비 지원, 재능 있는 저소득층 학생 지원, 지구온난화에 대응하기 위한 베트남 맹그로브 숲 복원 사업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협력사에 전달된 기금은 어떻게 활용되나.

“우리와 6개월 이상 동고동락한 협력사들에 매해 설 전 기금을 전달하고 있다. 올해는 1월 28일 기금 전달식을 열고 60여 개 협력사 4421명에게 23억6000만 원을 전달했다. 이 돈은 전액 협력사 직원들에게 배분된다.”

1인당 50만 원 조금 넘는 돈이 전달되는 셈이다.

“정성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큰 금액은 아니지만, 협력사 직원들을 우리와 함께 일하는 동료로 생각하며 존중하고 있다는 마음의 표시다. 어느 사업장에서나 원청과 하청 직원 간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다. 이걸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서 상생기금을 시작했다. 우리가 작게라도 정성을 보여줌으로써 갈등이 줄고, 좀 더 신명나는 일터가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대·중소기업 간 갈등이 사회 문제인데, 이 문제를 해소해가는 데도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다. 협력업체 사장들이 직원들에게 설 보너스로 크지 않은 돈을 지급하려니까 민망한데, 우리가 전달한 기금을 보태게 돼 경상도 말로 그나마 덜 손시럽다(‘미안하다’는 뜻)고들 한다.”

여느 노조와 마찬가지로 SK이노베이션도 노사 간 합의한 임금인상안을 전체 조합원 찬반 투표를 통해 비준받는다. 소비자물가상승률에 연동한 임금인상안의 찬성률은 첫해인 2017년에는 74%, 2018년과 2019년에는 각각 90%와 88%를 나타냈다.

이 정도 찬성률이면 조합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고 할 수 있겠다.

“노조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 가지다. 신뢰, 상호 존중, 소통. 서로가 존중하며 신뢰를 쌓는 최선의 방법은 소통이더라. 자주 만나고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이길 장사는 없다. 그래서 노조 유니폼에 새긴 문구를 ‘단결, 투쟁’에서 ‘단결, 소통’으로 바꿨다. 집행부 간사들을 자주 현장으로 보낸다. 간담회도 시시때때로 연다. 작은 사안이라도 이야기를 나누면 서로 몰랐던 것을 알게 되고 오해도 해소된다. 사측과도 마찬가지다.”

노사 간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다는 것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인사평가가 객관적이지 않다거나,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때 과도하게 생산 현장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있다거나 하는 일은 우리 회사를 포함해 어디에서나 있을 수 있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노조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단결, 투쟁’이라고 적힌 노조 유니폼이 하나 더 있다. 충분하게 소통했음에도 회사가 노조와 조합원을 존중하지 않으면 유니폼을 바꿔 입고 행동에 나선다.”
3월 5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 SK빌딩에서 열린 2019년 임금교섭 조인식에서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 이정묵 노동조합위원장, 조경목 SK에너지 사장(왼쪽부터)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날 SK이노베이션 노사는 올해 임금을 전년도 소비자물가상승률에 연동해 1.5% 인상하기로 합의했다. [사진 제공 · SK이노베이션]
3월 5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 SK빌딩에서 열린 2019년 임금교섭 조인식에서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 이정묵 노동조합위원장, 조경목 SK에너지 사장(왼쪽부터)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날 SK이노베이션 노사는 올해 임금을 전년도 소비자물가상승률에 연동해 1.5% 인상하기로 합의했다. [사진 제공 · SK이노베이션]
다른 대기업 노조들, 벤치마킹하러 와

일부 대기업 노조의 이기주의에 대한 사회적 지탄이 거세다.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낡은 사고의 틀을 고수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1980년대 노조는 투쟁을 통해 임금인상을 쟁취했다. 그렇게 대기업 임금은 상향 평준화됐다. 더는 투쟁을 통해 임금을 쟁취할 형편도 아니고, 투쟁한다고 해서 임금을 더 올릴 수 있는 환경도 아니다. 그보다 사회적 소득 격차와 그로 인한 갈등 문제가 더 심각하다.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대기업 노조도 외면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그럼에도 SK이노베이션처럼 상생 실험에 나서는 대기업 노조는 드물다.

“투쟁으로 얻어낸 것만이 의미 있다고 보는 낡은 사고의 틀을 여전히 고수하기 때문이다. 투쟁하지 않으면 어용(御用)으로 간주돼 노조 내 상대 계파로부터 비난을 당한다. 내가 임금인상률을 소비자물가상승률에 연동시키겠다고 하자 일각에선 ‘임금투쟁을 안 하면 노조가 대체 무슨 일을 하겠다는 거냐’고 했다. 조합원의 권익 향상을 위한 여러 부속적 요구들, 부당 노동 행위에 대한 대처 등 임금투쟁 말고도 노조가 할 일은 많다. 울산에는 다른 정유회사나 제조 대기업이 여럿이다. 거기 직원들이 한동네 이웃이다. 이들에게 투쟁 대신 상생으로 임금인상 등을 꾀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 ‘그거 참 괜찮다’고들 한다. 하지만 노조 간부들은 어용으로 매도될까 두려워 상생을 시도할 생각조차 안 한다. 안타깝다.”

SK이노베이션은 대한민국 굴지의 에너지·화학기업이다. 최근 국제유가 하락으로 석유제품 가격이 떨어지기 전까지 연매출 규모는 70조 원에 달했다. 지난해에는 46조 원 매출과 3조2300억 원 영업이익을 거뒀다. 창사 이래 적자를 낸 적은 2014년 딱 한 번이다.

매출, 이익, 업종 특성 등 SK이노베이션은 여러모로 넉넉한 형편이니까 노사가 상생하기 좋은 조건 아닌가.


“대규모 장치산업의 특성상 생산설비를 금방 다른 데로 옮길 수도 없고, 정유사업의 경우 국제유가 흐름에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수요가 안정적인 것은 사실이다. 새롭게 추진되고 있는 배터리사업도 기존 사업을 축소시키고 하는 것이 아니라서 별다른 이슈가 없다. 하지만 이런 조건하에서만 노사 상생을 추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각 회사마다 자신들의 업황과 임금 구조를 분석한 뒤 그에 걸맞은 지표를 찾아낸다면 임금 협상을 놓고 벌이는 소모전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은 노조 집행부가 일반 조합원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경청해봤으면 좋겠다.”

올해 말로 3년 임기가 종료된다. 집행부가 바뀌더라도 노사 간 상생이 지속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나.

“임금인상 합의안에 대한 조합원 찬반 투표 결과를 보면 어떤 집행부가 새로 오더라도 상생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조합원의 90%가량이 찬성하는 사안을 깨기란 쉽지 않다. SK이노베이션 같은 노사 간 상생이 다른 기업으로 확대되는 것이 당장 성사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다른 대기업 노조들이 우리를 벤치마킹하고 싶다며 찾아오기 시작했다. 앞으로 조금씩 한국 노사 문화가 바뀌어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기대해본다.”

Tip

SK이노베이션 노동조합은 SK이노베이션과 자회사 SK에너지, SK종합화학, SK루브리컨츠 등의 조합원으로 연합 구성돼 있다. 전체 직원 6500여 명 가운데 조합원은 2500여 명으로 울산CLX에서 근무하는 생산직 직원이 주축을 이룬다. 2005년 SK그룹에 인수된 SK인천석유화학(옛 인천정유)은 별도의 노조를 구성하고 있다.

울산=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181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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