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위원장, 세계 여론은 당신 편이 아니야 [신석호 기자의 우아한]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18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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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호 북한 외무상(오른쪽에 앉은 사람)과 최선희 부상이 1일 베트남 하노이 멜리아호텔에서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에 대한 북한 측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하노이=AP뉴시스
이용호 북한 외무상(오른쪽에 앉은 사람)과 최선희 부상이 1일 베트남 하노이 멜리아호텔에서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에 대한 북한 측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하노이=AP뉴시스
북한 이용호 외무상과 최선희 부상이 지난달 28일 심야에 베트남 하노이에 있던 외신 기자들을 멜리아호텔로 불러 들였을 때, 저는 하노이에서의 마지막 밤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역사적인’ 현장에는 가지 못했지만, 뒤늦게 연락을 받은 한국 기자들이 달려갔을 때, 미국과 일본 등 외국 기자들이 일찌감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한밤 기자회견’의 타깃 오디언스는 ‘세계 여론’이라는 점을 직감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모든 핵무기와 미사일, 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WMD) 전체를 포기하라는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협상의 판을 깼다, 우리 위원장님은 피해자다’라는 식의 세계 여론 선전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15일 평양에서 북한 주재 외교관과 외신 기자를 대상으로 긴급 기자회견을 연 것이 가장 최근의 사례입니다. 러시아 타스통신의 1보로 알려지기 시작한 기자회견은 AP통신 등 순전히 평양에 지국을 두고 있는 외신들에 의해 알려졌습니다. 북한의 대내용인 노동신문은 관련 보도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이번 기자회견 역시 ‘세계 여론’에 호소하기 위한 국제용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북한은 지난 30여 년의 핵·미사일 개발 과정에 자신들에게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갈 때마다 세계 언론과 외교가를 상대로 선전전을 벌여 왔습니다. 중국과 러시아 등 우호국을 설득하고 상대국의 유력 인사들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나팔수 역할을 맡기는 ‘초청외교’를 반복해 왔습니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르게이 키슬랴크 등 러시아 상원의원들이 16일 평양에 도착해 21일까지 북한 측과 양국 관심사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고 타스 통신이 17일 보도했습니다. 키슬랴크 의원은 전 미국 주재 러시아 대사 출신으로 2016년 미국 대선에 러시아가 개입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지목돼 2017년 본국으로 소환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북한에서는 임천일 외무성 부상이 14일 모스크바에서 이고리 모르굴로프 아시아담당 외무부 차관과 세르게이 베르쉬닌 외무 차관을 잇달아 만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앞서 리길성 북한 외무성 부상은 2차 북미회담이 결렬되던 지난달 28일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왕이 중국 외교 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 부장을 만났습니다.

강대국인 중국과 러시아가 최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비핵화 흥정을 하다 한 방 맞고 온 옛 사회주의 동생국가 북한을 싸고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미국에게 버림받은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동정의 전문을 보낸 것도 일면 이해가 갑니다(15일 북한 노동신문). 하지만 북한의 노력이 진정 세계 여론을 변화시켜 미국의 대북정책을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국가 진영과 중국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전현 사회주의 국가 진영이 편을 가를 때 캐스팅 보트 역할을 했던 서유럽의 여론은 여전히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에 대해 싸늘한 반응입니다. 영국과 프랑스,독일 등의 언론과 외교가에서는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북한에 대한 동정심은 ‘1도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대신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불신만 여전한데, 북미 회담 전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과 대충 합의하는 ‘나쁜 거래(Bad Deal)’ 가능성을 우려했고 회담이 깨지자 저러다 또 북한과 전쟁을 한다고 할까봐 걱정이라고 합니다.

유럽 주요국들의 싸늘한 반응은 북한이 자초한 것이기도 합니다. 영국과 프랑스 등은 미국보다는 조금 더 북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었지만, 2017년 북한이 사거리 1만km이상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에 성공하면서 완전히 돌아섰습니다. 그 미사일을 평양에서 동쪽으로 쏘면 미국이 사정거리지만, 왼쪽으로 쏘면 런던과 파리, 베를린이 사정거리에 든다는 사실이 널리 퍼진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 서유럽 국가들은 트럼프가 밉고 못미덥긴 하지만 북한이 핵·미사일과 생화학무기 등 자신들의 국가이익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는 WMD 전체를 포기한다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기 전까지는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에서는 세계 여론이라는 것을 실체가 없는 신기루 정도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세계 여론은 자신의 생각을 전세계의 것으로 포장하고 싶은 개별 국가들의 헛된 망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각국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신의 국가이익 관점에서 저마다 달리 해석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태두로 추앙받는 고 한스 J 모겐소 전 시카고대 교수는 그의 대표작인 ‘국가간의 정치’에서 세계 여론의 허망함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북한 당국자들의 필사적인 세계 여론 선전전은 그 자체의 효과를 믿기 때문으로 보기 힘들어 집니다. 오히려 북미 2차 정상회담 결렬로 빈손으로 돌아온 뒤 최고지도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상황에, 죽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독재의 하수인’들의 처절한 몸부림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선희 부상은 김 위원장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유예(모라토리엄) 재개와 관련해 조만간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재재를 풀기 위한 협상이 또 다른 제재를 부르는 우를 범하길 바라지 않지만 북한 체제의 특성상 그 길을 갈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빈센트 부룩스 전 주한미군사령관이 말한 ‘김정은 체면 살리기(face saving)’가 가뜩이나 북한 편이 아닌 세계 여론을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 말입니다.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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