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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비서 출신 리루이 타계…“시진핑 개인숭배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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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비서 출신 리루이 타계…“시진핑 개인숭배 비판“

뉴시스입력 2019-02-17 07:06수정 2019-02-17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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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파 대표적인 논객 "톈안먼 사건 재평가·헌정 대실시 촉구"

중국 내 체제개혁파의 대표적인 논객으로 마오쩌둥(毛澤東) 비서이던 리루이(李銳)가 16일 숙환으로 베이징 시내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101세.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 벨레(DW)와 신화망(新華網) 등에 따르면 리루이의 딸 리난양(李南央)은 고인이 이날 이른 새벽에 눈을 감았다고 밝혔다.

1917년 베이징에서 태어난 리루이는 어린 시절부터 쑨원(孫文)의 동맹회를 추종하다가 우한(武漢) 대학 재학 중 좌익 비밀결사 운동에 뛰어들었다가 1937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리루이는 중국공산당 통일전선 활동에 펼치면서 베이징과 지난, 우한, 창사, 충칭을 전전했으며 1939년 옌안(延安)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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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초 옌안에서 발간하는 해방일보(解放日報) 편집자로 일했고 1949년 공산정권이 수립하자 신문선전과 청년 부문에서 근무하다가 수리부(水利部)로 전직해 1958년에는 수리부 부부장까지 올랐다.

그해 리루이는 싼샤(三峽) 개발사업의 폐해를 조사 분석한 보고서를 눈여겨본 마오쩌둥에 의해 공업 문제 비서로 발탁됐다.

리루이는 비서를 있으면서 펑더화이(彭德懷) 당시 국방부장과 함께 마오쩌둥이 주도해 농업과 공업의 대폭 증산을 시도한 ‘대약진 운동’을 비판하면서 반당분자로 몰려 당적을 박탈당하고 헤이룽장의 노동개조 농장으로 쫓겨났다.

리루이는 1961년 노동개조에서 풀려났지만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8년 동안 투옥돼 온갖 고초를 겪었다.

문화대혁명이 ‘10년 대란’ 끝에 종료하자 1979년 복권한 리루이는 수리전력부 부부장, 당중앙 조직부 부부장, 청년간부국 국장, 당중앙위원 등을 맡아 간부 세대교체와 능력 제고에 애를 썼다.

정년퇴직 후 1989년 톈안먼 사건 기간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 전 총서기를 지지하면서 대학생의 민주화 시위에 선처를 호소했다.

리루이는 개혁파 논단잡지 ‘염황춘추(炎?春秋)’를 중심으로 민주화를 가는 정치제도 개혁의 필요성 등을 촉구하는 문장을 내놓았다.

또한 여러 차례 당 대회에 참석해 톈안먼 사건의 재평가를 공개적으로 촉구하고 정치개혁을 통한 ‘헌정(憲政) 대실시’를 주장했다.

말년 들어 리루이는 공산당 지도부의 언론통제 강화와 시진핑(習近平) 당총서기 겸 국가주석에 대한 개인숭배 움직임에 우려를 표시했다.

리루이는 원로당원으로서 초청을 받은 2017년 제19차 당대회에는 건강상 이유를 들어 불참해 시진핑 지도부에 간접적으로 불만과 항의를 나타냈다.

작년 리루이 홍콩 명보(明報)와 인터뷰에서 “중국인은 개인숭배의 길로 흐르기 쉬운데 마오쩌둥에 이어 시진핑이 이 길을 가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얼마 전 미국의 소리(VOA) 방송과 회견에선 시진핑 주석에 대해 “지금 시진핑은 더는 충언을 듣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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