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고은 성추행 허위 아냐”…결정적 증거는 금고 속 ‘일기장 3권’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15일 2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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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최영미. 사진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시인 최영미. 사진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성추행 가해자가 피해자를 고소하는 일이 앞으로 없도록 완벽하고도 확실한 승리를 원했다.”

법원이 최영미 시인(58)의 손을 들어준 직후인 15일 오후 3시 서울중앙지방법원 인근 카페에서 동아일보 기자를 만난 최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최 시인은 지난해 2월 동아일보에 보낸 글을 통해 고은 시인(86)의 성추행 의혹을 증언했다.

보도가 나가고 5개월 뒤 고 시인은 최 시인과 동아일보 등을 상대로 약 10억 원 상당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해 8월 첫 변론이 열린 후 6개월 간 6차례의 재판이 열렸고 최 시인은 매번 법정에 출석했다. 1심 재판부가 1년 만에 최 시인의 증언을 ‘사실’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 ‘진실 입증’ 위한 투쟁

최 시인이 고 시인이 제기한 소장을 받은 건 지난해 7월 25일. 컨디션이 좋지 않아 잇몸 수술을 미루고 집에서 쉬던 중 등기 우편 한 통을 받았다. 소장을 처음 받아든 최 시인에게 처음 든 생각은 “잇몸 수술 안 하길 잘했다”였다고 한다.

‘그날 이후’ 최 시인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아는 변호사라곤 거의 없었던 그는 유난히 무더웠던 지난해 여름 소송 대리인을 알아보기 위해 여기 저기 다녀야 했다. 그러던 중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인 조현욱 변호사와 연락이 닿았다. 흔쾌히 최 시인의 재판을 맡아준 조 변호사에게 소송대리인단 구성을 맡겼고, 한국여성변호사회 소속 변호사 5명으로 ‘드림팀’(조현욱 차미경 안서연 장윤미 서혜진 변호사)이 꾸려졌다.

1994년 늦봄 인사동 술집에서 목격한 고 시인의 자위행위는 최 시인에게는 직접 경험한 사실이었으나 소송을 당한 이상 ‘입증’을 해야 했다. 1990년대 후반 한국작가회의 (당시는 ‘민족문학작가회의’라고 칭함) 탈퇴 후 문단 사교계와 멀어졌던 최 시인은 20여 년 만에 문인들에게 연락을 돌려야 했다. 그들의 전화번호를 찾아내는 것조차 쉬운 일은 아니었다.

최 시인은 1994년경 인사동 술집에 드나들던 문인 대여섯 명에게 직접 전화를 했다. 받는 이도 있었고 아예 통화가 되지 않는 이도 있었다. 최 시인은 “입을 열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입을 열게 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며 “뭘 물어보든 간에 ‘최영미’라고 말하자마자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문단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고은에 대해 말하는 걸 꺼려하는 게 당연했다”고 말했다.

수개월에 걸친 최 시인의 노력에 일부 문인들은 재판에 도움이 될만한 증거를 제공해줬다. 피해자, 목격자 등 5명의 진술을 확보했다. 직접 고 시인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이 있었고, 성폭력을 행사하는 고 시인의 모습을 목격한 이도 있었다.


● 결정적 증거가 된 ‘일기장 3권’


재판부가 최 시인의 증언을 사실이라고 판단하게 된 주된 증거 중 하나는 최 시인의 일기다. 1994년 6월 2일 작성한 최 시인의 일기에는 ‘광기인가 치기인가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 오기인가 - 고 선생 對(’대하여‘의 약칭) 술자리 난장판을 생각하며’라고 적혀 있다.

최 시인이 일기를 찾아보게 된 건 동아일보에 기고글을 보낸 직후였다. 재판에 고 시인 측 증인으로 나선 술집 주인 한모 씨가 자신의 SNS에 ‘최영미 주장은 허위’라는 취지의 반박글을 올린 뒤다.

최 시인의 동생 최영주 씨는 “언니는 예전부터 ‘내 재산 1호는 일기야’고 말할 정도로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일기를 써왔다”며 “한 씨의 반박글을 보고, 언니의 일기장에 왠지 ‘그 날’의 기록이 담겨있을 것 같아 언니에게 일기장을 뒤져보라고 했다”고 말했다. 최 시인의 책상 서랍에 보관된 일기는 총 노트 9 여권, 메모장 5~6권에 달한다.

최 시인은 1994년 경 작성한 일기장에서 고 시인의 추태를 목격한 이후 자신의 심정을 쓴 일기를 찾는다. 이후 그는 일기를 누가 훔쳐갈까 잠도 설쳤다고 한다. 지인의 은행 금고에 해당 일기장을 보관한 후에야 안도할 수 있었다.

2018년 8월 첫 재판이 열렸다. 최 시인은 원고 측의 대응이 “생각보다 훨씬 치졸했다”고 그때를 기억했다. 당시 고 시인 측은 사건 이후에도 최 시인과 고 시인이 몇 차례 더 만났던 점 등을 들어 “성폭력을 당했다면 그랬을 리 없다”는 취지로 변론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그 무렵 문단 내에서의 원고의 지위 및 영향력 등을 고려하여 보면 설령 최영미가 1994년 사건 이후에도 고은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았다고 해도 최영미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최 시인은 “‘재판과정에서의 2차 피해’라는 말은 언론에서 처음 들었는데 내가 직접 당하게 될 줄은 몰랐다”면서 “피해자로서 피해 사실을 증언했을 뿐인데 재판 과정에서 (상대측의 근거없는 인신 공격에 의해) 내 명예 역시 많이 손상됐다”고 말했다.

● 15개월에 걸친 ‘미투’…“완벽하고 확실한 승리 거두겠다”

최 시인이 처음 고 시인에 대한 ‘미투’를 결심한 건 2017년 9월. 계간지 ‘황해문화’로부터 ‘페미니즘’을 주제로 시 3편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는다. 외신을 통해 미국 할리우드에서 ‘미투 운동’이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접한 최 시인은 “문단 내 성폭력을 생각하며 바로 고은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이어 “(고은이) 공개된 장소에서 누워서 ‘자위행위’를 하면서 ‘니들이 만져줘’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그가 권력의 최정점에 있다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2017년 12월 ‘황해문화’에 시 ‘괴물’을 공개하며 처음 고 시인의 성폭력을 폭로한 최 시인은 그로부터 1년 2개월 만에 자신의 주장이 허위가 아님을 입증 받았다. 재판부는 최 시인의 일관된 진술과 증거 등을 근거로 “1994년 사건 관련 내용이 허위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에 대한 손해배상청구뿐 아니라 이를 보도한 본보에 대해 제기한 청구소송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원로 문인으로서 문화예술계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고 시인에 대한 보도는 공익성이 높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최 시인의 폭로 이후 정치·연극·법조계 등에서 ‘미투 바람’이 불었다. 최 시인은 “연극계에서 이윤택의 성폭력이 폭로되는 과정에서 내 이름이 언급되었을 때 보람을 느꼈다”면서 “문화예술계의 오래된 나쁜 관행,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맞아야 하는 폭풍이 있다면 젊은 그녀들보다 더 많은 세월을 살아온 내가 감당하는 게 맞지 않나”고 말했다.

이지훈기자 easy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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