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뚤빼뚤’ 뒤늦게 일본어 배워 인생 작문집 낸 재일 할머니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12일 19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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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말 일본 가나가와 현 가와사키 시에서 열린 재일 할머니들의 작문집 ‘나도 시대의 일부입니다’ 출판 기념회 현장. 가와사키=김범석 특파원 bsism@donga.com
지난 달 말 일본 가나가와 현 가와사키 시에서 열린 재일 할머니들의 작문집 ‘나도 시대의 일부입니다’ 출판 기념회 현장. 가와사키=김범석 특파원 bsism@donga.com
“입에도 담고 싶지 않은 말을 쓰는 것도 싫어 /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하니까 / 그것으로 당신들은 만족하는가. /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고 / 사쿠라모토(櫻本) 마을에 와서 함께 이야기 하며 사이좋게 지냅시다.”

일본 생활 50년째인 황덕자 할머니(78)는 50년 전 가족을 살리겠다며 현해탄을 건너온 재일동포 1세대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공부의 기회를 놓친 그는 민요 가수로 활동하며 요코하마(橫浜) 부근 클럽을 돌며 돈을 벌어야 했다. 어머니가 사기를 당하면서 벌어놓은 돈을 모두 빼앗긴 그는 무슨 일이든지 닥치는 대로 해야만 했다. 가와사키에(川崎) 터를 마련하고 어르신의 수발을 담당하는 도우미로 돈을 벌었다. 어르신과 외출을 할 때면 도로 표지판을 읽지 못해 난감할 때가 많았다. 가난만큼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은 ‘문맹’이었다.

우연히 알게 된 가와사키의 작문 교실에서 그는 일본인 자원 봉사자들을 통해 일본어를 배웠다. 주경야독의 삶을 살던 그 무렵 가와사키에서 우익 세력의 헤이트스피치(특정 인종에 대한 혐오 발언)가 그를 아프게 했다. 한국전쟁 당시 이웃이 몰살당해 동네가 피로 물든 것을 경험한 그에게 전쟁, 다툼은 진절머리 나는 존재였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2년 전 ‘헤이트스피치 싫어’라는 글을 썼다.

재일 할머니들의 작문 교실 ‘우리마당’ 현장
 ‘우리마당’ 제공
재일 할머니들의 작문 교실 ‘우리마당’ 현장 ‘우리마당’ 제공

‘삐뚤빼뚤’ 글 배워 차별과 아픔의 작문집 낸 재일(在日) 할머니들

지난 달 말 가와사키 시 사쿠라모토 마을에서 만난 황 할머니는 “일본인들이 일본을 떠나라고 하면 우리(재일동포 1세대)는 괜찮지만 여기서 자란 손자 손녀 등 자녀들은 큰 일”이라며 “한국인 괄시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뜻으로 글을 쓴 것”이라고 말했다.

황 할머니의 글은 ‘나도 시대의 일부입니다’라는 책에 담겨 있다. 재일동포 1세대가 모여 사는 사쿠라모토 마을에 황 할머니처럼 글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2004년부터 매주 작문 교실 ‘우리학교’가 열렸다. 현재는 ‘우리마당’으로 재편돼 작문 교실 외에도 요리 만들기 등 다양한 활동회가 열리고 있다. 이 곳에서 글을 배운 할머니들의 글이 지난 달 30일 책으로 출간됐다. 글씨는 삐뚤빼뚤하지만 내용에는 이들의 70~80년 인생이 녹아 있다. 이를 기념해 출판 기념회가 열렸다. 출간을 자축하기 위해 모인 15명의 할머니들은 자신의 대표작을 돌아가며 낭독했다. 그 중에는 93세의 서유순 할머니도 자리했다. 그의 93년 인생을 담은 글 ‘나도 시대의 일부입니다’는 책 제목으로 선정됐다.
재일 할머니들의 작문 교실 ‘우리마당’ 현장
 ‘우리마당’ 제공
재일 할머니들의 작문 교실 ‘우리마당’ 현장 ‘우리마당’ 제공

“초등학생 때부터 일을 해야 해서 /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 일본어를 할 수 없어 차별도 받았습니다. / 이런 나도 이 시대의 일부입니다.”

책에 실린 글 50편은 주로 어릴 적 기억이나 지금의 생각 등이 주제다. 자신이 자랐던 마을을 60여 년 만에 방문해 “초등학교의 이름은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 언덕도 그대로였습니다. / 그 마을에는 한국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 어머니는 통조림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 마치 한국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문서화 ‘내가 자란 마을의 추억’)라는 글을 쓰거나,

“전쟁 후 남편과 둘이서 여러 가지 고생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 남편은 성실한 노동자였습니다. / 그 남편이 숨을 거두기 전 간호사가 /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 남편은 나에게 ‘힘을 내세요’ / 큰 딸에게 ‘뒤를 부탁해’ / 마지막으로 간호사에게는 ‘감사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 나는 아이들에게 ‘사이좋게 지내라’라고 하고 싶습니다.”(최명란 ‘자녀들에게’)라며 가족을 향한 글을 쓰는 등 할머니들은 글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날 것’의 느낌으로 솔직하게 드러냈다. 할머니들은 작품을 낭독하며 감정이 북받쳤는지 잇달아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재일 할머니들의 작문 교실 ‘우리마당’ 현장
 ‘우리마당’ 제공
재일 할머니들의 작문 교실 ‘우리마당’ 현장 ‘우리마당’ 제공

‘문맹(文盲)’ 할머니들을 도운 일본 청년들

할머니들의 책 출간을 주도한 것은 출판사 직원인 요시다 모리노부 씨(27)와 와세다대 대학원 교육학연구과 박사과정 중인 강윤이 씨(30) 등 20, 30대 젊은 일본인들이었다. 이들은 인터넷에서 크라우드 펀딩 형식으로 출판 지원금을 모았다. 한 달 만에 140만 엔(약 1423만 원)을 모을 정도로 반응은 뜨거웠다.

특히 재일교포3세인 강 씨는 가와사키 할머니들을 보고 글을 쓰지 못했던 자신의 할머니를 떠올리며 작업에 참여했다. 강 씨는 “일반적인 글과 비교해 할머니들이 쓴 글에는 여유나 공백이 많다”며 “이 공백을 우리들의 상상력으로 채워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크라우드 펀딩 형식으로 200여 명의 일반 시민이 참여한 것에 대해 “개인 한 명 한 명이 책을 읽고 싶어 동참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며 “헤이트스피치가 만연한 현재 일본 사회에 메시지를 던진 것 같다”고 말했다.

요시다 씨는 “일본 정규 교육 과정에서는 재일 한국인들이 왜 일본에 왔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거의 배울 수 없어 스스로 찾아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 현실”이라며 “이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다보니 헤이트스피치 등 사회 문제가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현장에는 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준 자원봉사자들도 참석했다. 우리마당을 총괄하는 사회복지사 미우라 도모히토 씨(64)는 “할머니들의 글 속에는 힘들었지만 ‘우리 인생은 존중 받아야 한다’는 것이 글에 솔직하게 나타난다”며 “인생에 대한 적극성이 오늘의 출판으로 이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가와사키=김범석 특파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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