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죽어라 공부해도 죽지 않는다” 피말리는 ‘대치 전선’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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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에 매달린 대치동의 겨울방학

《 영훈이(가명·18)는 부산 사나이다. 지난해 12월 겨울방학을 하자마자 서울 강남구 대치동 A학원 근처에 레지던스를 잡았다. 고3이 되기 전에 대치동 학원에서 공부하겠다는 결심은 여름에 끝냈다. 겨울방학에 열리는 겨울 집중강의인 윈터스쿨은 예년보다 1개월 빠른 9월 초에 신청이 마감됐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렸다면 대치동에 못 왔을 것이다. 영훈이를 뒷바라지하려고 엄마도 같이 상경했다. 》
 
21일 오후 10시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일대 도로는 자녀들을 기다리는 학부모 차들로 주차장이 됐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21일 오후 10시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일대 도로는 자녀들을 기다리는 학부모 차들로 주차장이 됐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A학원 수강생 10명 중 1명이 영훈이처럼 지방에서 온 친구다.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지방 유명 고교에서도 3학년생 약 30명이 함께 왔다.

‘죽어라 공부해도 죽지 않는다!’

21일 아침에도 영훈이는 학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이 표어를 봤다. 영훈이는 매일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학원에서 공부한다. 일주일에 3과목, 10시간 반 동안 수업을 들을 때를 빼고는 꼼짝 않고 자습관에서 공부한다.

영훈이가 가장 긴장하는 시간은 밤 11시. 다음 번 강의 좌석 배치가 온라인 신청으로 이뤄지는데, 시스템 오픈 1분 만에 승부가 갈리기 때문이다. 목표는 ‘앞자리+파란색 좌석’이다. 분홍색 좌석은 여학생, 파란색은 남학생이 예약했을 때 뜬다. 한 자리라도 분홍색으로 칠해진 곳이 있다면 그 구역은 피한다. 서로 공부에 목숨 건 만큼 남녀가 나란히 앉지 않도록 서로 조심하는 게 불문율이다.
대치동 A학원의 1층 엘리베이터 앞에 붙어 있는 ‘죽어라 공부해도 죽지 않는다’는 표어.
대치동 A학원의 1층 엘리베이터 앞에 붙어 있는 ‘죽어라 공부해도 죽지 않는다’는 표어.
다른 학원은 앞자리에 앉으려고 수업 시작 1시간 반∼2시간 전부터 길게 줄을 선다. 아이들 수고를 덜어주겠다고 엄마, 아빠, 할머니가 나서기도 한다. 그래도 A학원은 시간 낭비 없이 엄마를 고생시키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다 싶다.

“지금 몇 시야?”

얼마 전 한 친구가 복도에서 이 말을 하고 학원에서 벌점을 받았다. ‘강력한 면학 분위기 조성!’ A학원이 전국적으로 학부모들에게 인기 있는 이유다. 모의고사 성적별로 자습관 반이 나뉜다. 모든 과목 1등급이면 ‘HS(High Supreme)반’, 한 과목만 2등급이면 ‘서울대/의치대반’으로 배치된다. 잠깐 졸기만 해도 뒤에 있던 선생님이 와서 벌점을 준다. 쉬는 시간 외에 화장실 가는 건 하루에 딱 한 번만 허용된다.

부산의 영훈이네 학교는 28일에 개학한다. 하지만 설 연휴에도 학원에서 수업을 들으려고 학교에 5일짜리 체험학습 신청서를 냈다. 서울 사는 친구들은 2월에도 쭉 수업을 듣는단다. 21일에도 친구들은 엄마 카드를 들고 와 서너 개씩 수강료를 결제했다. 이번 방학에 영훈이는 부산에 있을 때보다 몇 배 더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도 너무 불안하다.

그래픽 김충민 기자
그래픽 김충민 기자
영훈이네처럼 지방에서 와 학원 뒷바라지하는 엄마를 ‘식모살이 한다’고 표현한다. 대치동 학원가의 레지던스를 한두 달 계약하고, 자식 잘 먹이는 일에 올인한다. 점심 도시락을 학원으로 나르고 밤 10시에 학원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면 간식을 해 먹인다.

같이 대치동 생활을 못 하는 지방 부모는 ‘학사’라고 불리는 고급 고시원에 자녀를 맡긴다. 한 달 비용이 100만∼120만 원으로 만만치 않지만 엄마 손길을 대신해주는 값이니까. 학사는 아침 6시에 깨워주고, 식사 청소 빨래를 다 해준다. 서울 길이 낯설까 걱정하는 부모를 위해 학원까지 셔틀버스를 운영하는 곳도 있다. 여학생 전용 B학사 관계자는 “밤 11시에 학사로 잘 들어왔는지 인원 점검하고 부모에게 안내 문자도 보내준다”고 말했다.

아빠들도 열성적이다. 예비 고3 딸을 A학원에 보내는 서울 강북의 학부모 김준우(가명) 씨는 퇴근 후 밤 9시면 집에서 차를 몰고 대치동에 온다. 딸이 나오려면 1시간가량 기다려야 하지만 이때가 아니면 학원 건물 뒤에 주차할 공간을 차지할 수 없다. 2년 연속으로 방학 때 대치동 학원 뒷바라지를 하며 생긴 노하우다. 김 씨는 “힘들지만 고3 아빠니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21일 밤 9시 45분부터 10시 10분 사이 대치역 사거리와 은마아파트 사거리는 도로 양쪽 1, 2개 차로가 주차장으로 변했다. 메르세데스벤츠, BMW, 아우디 등 대부분 외제차다. 강남구와 경찰, 모범운전사가 나와 차를 빼라며 호루라기를 불어댔다. 그래도 차량들은 비상등만 깜빡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학원에서 쏟아져 나온 학생들이 뿔뿔이 도로 위로 뛰어들자 그제야 자리를 떴다. 최근 대출을 받아 대치동에 이사 온 한 학부모는 “빚내고 아이도 나도 고생하느니 그 돈 아껴뒀다 나중에 하고 싶은 거 하라고 주는 게 현명한가 싶기도 하다”며 “하지만 우리 아이를 실패자로 만드는 죄인이 될까 봐 두렵다”고 말했다.

최예나 기자 yena@donga.com
#사교육#대치동의 겨울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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