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들고 南北 함께 中으로 가는 게 김정은 플랜B”

  • 신동아
  • 입력 2019년 1월 21일 15시 31분


코멘트

● 南-北-中 vs 美 ‘3대 1 구도’
● 핵 ‘동결’은 해줄 테니 제재부터 풀라
● ‘완전한 비핵화’는 핵 군축 협상
● ‘자력갱생’…장기전도 대비

1월 10일 중국 CCTV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쓰는 장면을 보도했다.
1월 10일 중국 CCTV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쓰는 장면을 보도했다.
 “북한은 구호(口號)의 나라다.”

수키 킴은 평양에 잠입해 취재한 후 책을 쓴 한국계 미국인 작가다. 2014년 출간된 ‘당신이 없으면 우리도 없다(Without You, There Is No Us)’는 ‘잠입 저널리즘’ 교과서. 그는 사방에 적힌 구호가 ‘북한의 오늘’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구호는 인민이 수령의 지시에 따라 반드시 관철할 목표를 압축한 것이다. 선전물은 나치 문양인 스와스티카(Swastika) 같은 역할을 한다.”

조선중앙TV가 보도한 1월 4일 평양 김일성광장 모습은 수키 킴이 말한 ‘구호의 나라’를 실감케 한다. 곳곳에 부착된 대형 선전 문구 앞에서 시민들이 구호를 외친다. “경애하는 최고 영도자 김정은 동지께서 올해 신년사에서 제시하신 강령적 과업을 철저히 관철하자!”고 외치자 “관철하자!” “관철하자!”가 메아리친다.

1월마다 북한 전역에서 신년사 내용을 학습하고 결의를 다지는 군중집회, 토론 모임이 열린다. 신년사는 최고 지도자가 수행하는 행위 중 정치적 비중이 가장 높다. 피통치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직접 통치면서 공식 정책 발표다.

북한이 핵무장에 박차를 가한 2017년 신년사를 관통한 낱말은 ‘핵탄두’ ‘수소탄’ ‘대륙간탄도로켓’이다. 평양은 그해 11월 29일 “국가핵무력 완성의 역사적 대업, 로켓강국 위업이 실현됐다”고 선포했다.

휴전선 이남 전역 무장 해제 추구

2018년에는 “핵무력 완성의 역사적 대업” “책임 있는 핵 강국” “미국 본토 전역이 우리 핵 타격 사정권 안” 등 핵보유국 지위를 강조하면서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용의와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피력했다. 남북 정상은 지난해 3차례 만났다.

평양은 2018년 4월 ‘당 중앙위 제7기 제3차 전원회의’ 결정을 통해 “경제건설과 핵무력 병진 노선의 위대한 승리”를 선언했다. 30년에 걸친 핵무장국가 전략을 총화(總和)한 것이다. 2019년 신년사에서 김정은이 이 결정을 다시 언급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해 4월 진행된 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는 병진 노선의 위대한 승리하에 토대해 우리 혁명을 새롭게 상승시키고 사회주의 전진 속도를 계속 높여나가는 데서 전환적 우위를 가지는 중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북한은 핵·경제 병진노선을 폐기한 게 아니다. 핵을 뒷배로 체제를 지키면서 경제를 발전시키겠다는 구상을 가졌다. 북한이 말하는 ‘완전한 비핵화’ 과정은 핵보유국 지위에서 미국과 군축 협상을 벌이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20일 조선중앙통신에 실린 논평을 읽어보자.

“조선반도 비핵화는(…) 북의 핵 억제력을 없애기 전에 조선에 대한 미국의 핵 위협을 완전 제거하는 것이다.(…) 북남 영역 안에서뿐 아니라 조선반도를 겨냥한 주변으로부터의 모든 핵 위협요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 논평의 함의는 미국의 핵우산 제공 및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 중단과 주한미군 철수가 이뤄지면 비핵화를 하겠다는 뜻이다. 김정은은 올해 신년사에서 비핵화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북과 남이 평화 번영의 길로 나가기로 확약한 이상 조선반도 정세 긴장의 근원으로 되고 있는 외세와의 합동 군사연습을 더 이상 허용하지 말아야 하며 외부로부터의 전략자산을 비롯한 전쟁장비 반입도 완전히 중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입니다. 정전협정 당사자들과의 긴밀한 연계 밑에 조선반도의 현 정전체계를 평화체계로 전환하기 위한 다자 협상도 적극 추진해 항구적인 평화 보장 토대를 실질적으로 마련해야 합니다.”

‘자력갱생’ 집권 후 첫 등장


김정은 발언 중 “완전히 중지”는 핵우산 전력을 포함한 전략자산 전개를 ‘앞으로 영원히 하지 말라’는 요구다. ‘주한미군 철수’ ‘한미동맹 철폐’와 ‘미국에 대한 북한의 핵 공격 능력 제거’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협상하겠다는 뜻이다. “정전협정 당사자들”인 한국 북한 미국 중국이 참여할 다자 협상은 북한이 대가로 받을 것을 논의하는 자리가 될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추구하는 중국에도 주한미군은 눈엣가시다. 북한은 4자 회담이 3(한국 북한 중국)대 1(미국) 구도가 되기를 바란다.

‘구호의 나라’ 북한의 2019년 신년사에서 김정은이 언급한 구호는 2개다. ①‘자력갱생의 사회주의 건설의 새로운 진격로를 열어나가자.’ 이것이 우리가 들고 나가야 할 구호입니다. ②‘온 민족이 역사적인 북남 선언들을 철저히 이행해 조선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의 전성기를 열어나가자.’ 이 구호를 높이 들고 나가야 합니다.

2019년 신년사에서 눈에 띄는 핵심어는 ‘자력경생’ ‘자립경제’다. 목표 달성을 위해 장기전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자력갱생 구호는 김정은 집권 이후 처음으로 출현했다. 자력갱생을 강조한 것은 대북 제재가 작용함을 의미한다.

미국의 소리(VOA)가 북한의 주요 교역국 수출입 자료 등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최근 2년간 북한의 외화 수입이 2억 달러 넘게 감소했다. 2018년 북·중 교역액도 2017년 대비 크게 줄어들었다는 게 VOA의 분석이다. 구호①은 제재에 대응해 장기전을 준비하자는 호소인 것이다.

김정은은 신년사를 통해 미국과의 관계 개선 의지를 피력했다. 대미 관계 부분은 “핵 단추가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다”는 등의 격한 문장을 사용한 지난해와 달리 언어가 부드러우며 절제돼 있다.

“6·12 조미 공동선언에서 천명한 대로 새 세기 요구에 맞는 두 나라의 요구를 수립하고 조선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완전한 비핵화로 나가려는 것은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의 불변한 입장이며 나의 확고한 의지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미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지도 시험하지도 않으며 사용하지도 전파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데 대해 내외에 선포하고 여러 가지 실천적 조치들을 취해왔습니다. 우리의 주동적이며 선제적인 노력에 미국이 신뢰성 있는 조치를 취하며 상응하는 실천 행동으로 화답에 나선다면 두 나라 관계는 보다 더 확실하고 획기적인 조치들을 취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훌륭하고도 빠른 속도로 전진하게 될 것입니다.”

핵 실험, 핵무기 제조, 사용, 이전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동결’을 의미한다. 핵을 일단 동결할 테니 핵 군축 협상에 앞서 제재 완화와 개성공단 가동 및 금강산 관광 재개를 먼저 허용하라는 요구다.

“겨레의 단합된 힘으로 활로 열자”

‘남북 공동선언의 철저한 이행’을 언급한 구호②는 남북 관계를 선행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제재 완화 쪽으로 국면을 전환하려는 의도다. 한국을 활용해 미국을 움직이겠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끼리’라는 말은 북한 핵은 한국에 위협이 아니라는 착시 현상을 일으킨다.

김정은은 민족 공조와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과 관련해 신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과 남이 굳게 손잡고 겨레의 단합된 힘에 의한다면 외부의 온갖 제재와 압박도 그 어떤 도전과 시련도 민족 번영의 활로를 열어나가려는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개성공업지구에 진출했던 남측 기업인들의 어려운 사정과 민족의 명산을 찾아보고 싶어 하는 남녘 동포들의 소망을 헤아려 아무런 전제조건이나 대가 없이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 관광을 재개할 용의가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개성공단 재가동 및 금강산 관광과 관련해 제재를 우회하는 방안을 찾고 있다. ‘타임’은 “문 대통령이 제재 완화를 모색 중”이라면서 “김정은의 제안에 대한 상징적 응답으로 읽히지만 미국과의 관계를 해칠 수 있다”고 봤다.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다만’이라는 단서를 달고 ‘새로운 길’을 언급했다. 미국과 관계 개선 의지를 표명한 후 덧붙인 문장이다.

새로운 길

“미국이 세계 앞에서 한 자기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우리 인민의 인내심을 오판하면서 일방적으로 그 모습을 강요하려 들고 의연히 공화국에 대한 제재와 압박으로 나간다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이 부득불 나라의 자주권과 국가의 최고 이익을 수호하고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이룩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잇따른 핵실험, 미사일 시험발사로 군사 긴장이 고조된 2017년으로 되돌아가겠다는 뜻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하지 않고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라고 완곡하게 표현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미국과 관계 개선에 노력하되 플랜B를 마련하겠다는 뜻이다.

뤼디거 프랑크 오스트리아 빈대학 교수는 국제질서 지각변동이라는 큰 판 위에서 ‘새로운 길’을 분석했다. 그는 1월 2일 ‘38노스’에 기고한 글에서 김정은이 “전략적 폭탄선언(Strategic Bombshell)을 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전한 메시지는 ‘당신은 안보와 경제 발전의 유일한 대안이 아닙니다. 협력을 거부하면 우리는 당신을 무시하고 중국으로 향할 겁니다. 한국도 함께 데리고 갈 거예요’다.”(a message to Donald Trump: You are not our only option for security and economic development. If you refuse to be cooperative, we will ignore you and turn to China. Oh, and we will take South Korea along.)

프랑크 교수는 “김정은은 미·중 간 냉전 2.0 상황에서 안보와 경제 양면에서 중국의 지원을 낙관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김정은은 1월 7~10일 방중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무역전쟁은 미·중 패권 경쟁의 서막일 뿐이다. 현실주의 정치학에 따르면 ‘기존 대국’과 ‘상승 대국’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보수진영에서 문재인 정권 핵심에 포진한 86세대의 반미친중(反美親中) 정서를 우려하듯 미국은 한국의 핀란드화(finlandization·핀란다이제이션)를 우려한다. 핀란드화는 1960년대 서독에서 생겨난 말로 냉전 시기 소련과 핀란드의 관계를 빗댄 표현이다. 약소국이 독립을 유지하면서 인접 강대국에 묵종(默從)적 자세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 소련은 핀란드의 내정에도 간섭했다. 미·소 냉전 시절 미국은 일본과 서유럽 일부 국가의 핀란드화를 걱정했다.

한국의 ‘핀란드화(finlandization)’

라종일 전 영국 주재 한국대사는 신동아 2018년 6월호 인터뷰에서 “책임 있는 분 중 안보를 중국에 맡기자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고는 “우리가 중국에 안전 보장을 맡기고 나서 주권국가로 제대로 살 수 있나요?”라고 되물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외정책 복심으로 통하는 문정인 대통령통일외교안보특별보좌관은 2014년 6월 ‘중앙일보’에 기고한 ‘핀란드화라는 이름의 유령’ 제하 칼럼에서 핀란드화를 ‘약소국의 생존전략’으로 봤다. 칼럼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중국의 부상에 대한 우려가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 우선 북한이 중국 경제에 예속되고, 중장기적으로는 한국마저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게 아니냐는 두려움이 그것이다. ‘핀란드화’란 무엇인가. ‘핀란드화’를 단순히 강대국에 대한 약소국의 일방적 예속으로 규정하는 시각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변화하는 대외환경에 유연하게 적응한 약소국의 생존전략으로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중국의 부상을 마주한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운명은 강대국의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단합과 대응전략에 달려 있다는 것이야말로 냉전기 핀란드의 생존전략이 한국에 주는 값진 교훈일 것이다.”

한국 정부는 “북한이 김정은 위원장 신년사를 통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정착, 남북관계 확대 발전을 위해 계속 노력해나가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익명을 원한 국책연구기관 관계자는 “북한의 치밀한 전략을 선의로만 해석하는 게 답답하다. 잘 모르는 건지, 순진한 건지, 알면서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면서 “김정은의 플랜B는 핵을 보유한 채 한국을 미국으로부터 떼어놓고 남북이 함께 중국에 경사(傾斜)된 국가가 되는 것”이라고 봤다.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이 기사는 신동아 2월호에 실렸습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