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석호]통계와 민주주의, 그리고 시민성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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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조사 거부하면 과태료’ 추진했다 文대통령 질책에 통계청장 입장바꿔
좋은 정책 만들려면 좋은 통계 필수적… 호주-日은 조사 거부하면 벌금물려
정치가 통계 위에 군림하는 현실 씁쓸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통계청 간부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들의 정체성이 궁금하다. 그들은 대통령이 임명한 대한민국 정부에서 일하는 공무원이다. 하지만 그들의 통계에 대한 전문성은 그들을 학계의 동료로 여기게 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반대에 통계청장이 가계동향조사 응답 거부 시 과태료 부과 입장을 바로 철회하는 것을 보고는 그들의 공무원으로서의 정체성에 더 무게를 두게 되었다. 실망스러웠다. 대통령의 한마디에 검토와 고민 끝에 내놨을 통계의 질 향상 방안을 반론이나 토론도 없이 바로 포기하는 모습에서 통계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으며 통계 위에 정치가 있다는 뻔한 사실을 확인하는 것 같아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씁쓸하다.

통계청이 여론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과태료 부과 방침’을 발표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가계동향조사는 정보 수집을 전적으로 시민의 자발적 협조에 의존해야 한다. 이를 수행하기에 한국의 조사 환경은 실로 악화 일로다. 전 국민의 아파트 거주 비율이 60%를 넘기 때문에 조사 대상 가구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1인 가구, 맞벌이 가구가 급증한 뒤부터는 조사 대상자 접촉이 더 어려워졌다.

언론과 정치인은 통계의 질을 논할 때 사회인구학적 분포에만 초점을 둔다. 하지만 통계의 대표성은 표본으로부터 ‘충실한 응답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시민의 협조가 비교적 양호한 호주나 일본에서조차 통계법에 국가 정책의 근간이 되는 조사를 이유 없이 거부한 시민에게는 벌금을 물리고 있다. 따라서 통계청의 통계의 질 향상을 위한 고육지책을 민주주의에서 시민이 누려야 할 권리의 관점만이 아닌 다수의 시민이 고른 삶의 질을 누릴 정책을 위해 필요한 시민적 의무의 관점에서도 바라볼 필요도 있다.

통계의 질은 그 국가의 민주주의 수준과 시민사회의 질을 반영한다. 통계청 면접원이 조사 대상자를 찾아가 응답을 얻기 위해서는 신뢰가 전제돼야 한다. 정부가 취득한 시민의 정보를 악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법과 제도에 대한 신뢰, 갑자기 방문한 면접원에게 선뜻 문을 열어주는 타인에 대한 믿음, 공익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내어줄 수 있다는 실천적 희생 등이 필요하다.

이것들은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고 시민사회에 생기가 넘쳐야 가능하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시민사회의 활력은 시민성에서 나온다. 시민성은 사회적 행동에 대한 규범이다. 주로 평등, 자율성, 권리, 의무, 공공재, 공공토론, 공동체에의 헌신 등과 관련 있다. 시민성이 높은 사회에서는 공공선을 위해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토론하고, 행동하는 시민이 많다. 그리고 공익에 기여하는 시민이 많은 곳에서는 공정성, 투명성, 신뢰가 사회적 가치로 자리 잡고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다.

현재 통계청이 겪는 통계 작성의 어려움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실천하는 시민이 부족한 데에서 기인한다. 통계청이 내놓았던 과태료 부과 방안은 시민의 의무를 제도적으로 강제하려는 고육지책인 것이다.

한국사회는 독재에 저항하며 시민사회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이후 국가와 시장의 영향력에 상응하는 시민사회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 이는 시민사회의 형성이 시민들의 참여나 장기적 학습이 아니라 일부 정치엘리트에 의해 주도됐기 때문이다. 시민단체의 정치엘리트들은 제도권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이 때문에 시민사회는 시민의 생활 속으로 파고들어 국가와 시장을 견제하는 축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시민은 시민사회 내부의 공론에서도 배제됐고 기껏해야 시민적 덕목을 함양하는 시민교육이나 교양교육의 수강생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토양에서 시민성을 가진 시민이 저절로 성장하는 것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우리는 민주화에는 적극적이지만 지속적 참여와 실천에는 인색하다. 불공정하고 부도덕한 정권에 분노하고 광장에서 민주화를 만드는 시민은 많다. 하지만 정작 민주화가 된 이후에 민주주의의 성숙을 위해 실천하는 시민은 드물다. 대부분 이를 정치에 떠넘기고 개인의 이익과 주변의 안위에 집중한다.

최근 우리는 개인의 권리와 자율성을 최우선의 가치로 보는 경향이 있다.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이 개인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권리만 주장하고 의무와 실천을 등한시하는 사회에서는 갑질과 불공정이 일상화되고 민주주의가 후퇴한다. 가계동향조사 과태료 논란도 마찬가지다. 좋은 통계는 통계청만의 노력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회학자인 송호근 포스텍 석좌교수가 몇 해 전 제기했던 질문을 이번 통계 논란에 다시 던지고 싶다.

“나는 시민인가?”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통계청#가계동향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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