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그레브로 간 택시 보냈더라면, 지금은 北으로 납치? [동정민 특파원의 파리 이야기]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18일 14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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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 윤정희 ‘절친커플’ 러브스토리 2화

지난달 25일 크리스마스 당일, 백건우 윤정희 부부가 파리 튈르리 공원 크리스마스 마켓을 찾았다. 수많은 인파에 속에서도 그들을 알아보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았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지난달 25일 크리스마스 당일, 백건우 윤정희 부부가 파리 튈르리 공원 크리스마스 마켓을 찾았다. 수많은 인파에 속에서도 그들을 알아보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았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그 때는 파리 전체가 우리 집이었어요. 꼭 집에 안 들어가도 되잖아요. 걷다가 마음에 드는 호텔 있으면 거기서 자고 그랬죠. 그 때 파리는 얼마나 낭만적이었는지…”

지난달 25일, 백건우와 윤정희는 파리 콩코드 광장 옆 튈르리 공원에 마련된 크리스마스 마켓을 찾았다. 샹젤리제 거리에 섰던 크리스마스 마켓은 올해 차량 돌진 테러를 대비해 공원 안으로 옮겨졌다. 손을 꼭 잡고 크리스마스 관련 액세서리와 군것질거리를 살피는 그들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번졌다.

이 곳은 결혼 전 두 사람의 데이트 단골 장소였다.

1973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 온 윤정희는 이 곳 근처 루브르박물관 옆에서 하숙을 하며 학교에 다녔다. 당시 서강대 총장 신부가 소개해 준 프랑스 변호사 가정집이었다. 연애 시절 백건우와 윤정희는 하숙집 근처인 이 곳을 수도 없이 함께 걸었다. 길이가 1km에 달하는 이 공원은 헤어지기 싫은 두 사람이 걷기에 딱 이었다.

“(백)지금은 수시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연락할 수 있잖아요. 그 때는 집 전화로 여기서 만나자고 약속하면 그걸로 끝이었죠. 무슨 수가 있어도 와야 했어요.”

두 사람이 튈르리 정원을 처음 찾은 건 1972년이었다. 뮌헨에서 처음 만나 신상옥 감독과 함께 파리로 왔을 때다.

“(백)그 때 여기 바로 옆 서점에서 신 감독이 영화 관련 책을 샀는데 엄청 고생하셨어요.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영화 서적이 탐나서 많이 사셨는데 이 정원이 이렇게 길 줄 몰랐던 거죠. 도저히 안 되시겠는지 저에게 한 권 주시더라고요. 하하.

두 사람은 마켓을 돌다 뜨거운 와인 ‘뱅쇼’(Vin Chaud) 한 잔씩 샀다. 두 손으로 잔을 꼭 잡고 와인을 후후 불며 대화를 이어갔다.

한바퀴 돌아본 뒤 뜨거운 와인인 뱅쇼를 마시며 추위를 녹이는 두 사람.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한바퀴 돌아본 뒤 뜨거운 와인인 뱅쇼를 마시며 추위를 녹이는 두 사람.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윤)파리 오기 전 한국 배우시절에는 아버지가 몸가짐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고 엄하게 말씀하셔서 술을 거의 안 마셨어요. 그런데 여기 하숙집에서 처음 와인을 마시는데 너무 맛있는 거야. 지금도 와인 참 좋아해요. 단란한 가정집이었어요. 하숙집에서 설거지도 했죠.“
백건우는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끼어 있는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결혼 이후 한 번도 뺀 적이 없다고 했다. 반지 안에는 이름과 날짜가 적혀 있다.

백건우가 왼쪽 넷째 손가락에 끼고 있던 결혼반지를 꺼내 속에 적힌 이름과 날짜를 보여주고 있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백건우가 왼쪽 넷째 손가락에 끼고 있던 결혼반지를 꺼내 속에 적힌 이름과 날짜를 보여주고 있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백)결혼반지를 여기에서 가까운 ‘평화 거리(Rue de la paix)’ 금은방에서 샀어요. 둘이 같이 가서 골랐죠. 그냥 너무 가늘지 않은 두툼한 걸로 골랐어요.“

백건우는 정확한 가격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당시 기사에 따르면 이 백금반지는 고작 160프랑(한화 1만5000원) 짜리였다.

● 결혼

결혼식은 1976년 3월14일, 파리 20구 이응로 화백 집에서 진행했다. 한국에 있는 가족과 자주 만나지 못하는 백건우 윤정희에게 이응로 화백 부부는 부모처럼 가까웠다. 1년 뒤 엄청난 악연으로 엮일 줄은 이 때만 해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평생 한 번 하는 결혼식인데 너무 소박하게 한 거 아닌가요.

”(백)결혼은 남에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우리끼리 약속이라고 생각했어요. 결혼식 날 온 사람이 20~30명밖에 안 됐을 거에요. 프랑스 친구들 좀 왔고, 아마 당시 특파원들은 왔을 거에요. 사진사도 부르지 않았어요. 건축하는 아는 분이 결혼식 사진을 찍어줬죠.“

부모님들도 참석하지 못했다. 혼수도 없었다. 턱시도와 드레스 대신 윤정희 어머니가 보내준 전통 한복을 입었다. 이 어머니 박소순 씨는 지난 12일 9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1976년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 백건우는 윤정희를 가리키며 “웨딩드레스보다 한복이 훨씬 아름답지 않냐”고 되물었다. 사진 제공 백건우 윤정희 부부
1976년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 백건우는 윤정희를 가리키며 “웨딩드레스보다 한복이 훨씬 아름답지 않냐”고 되물었다. 사진 제공 백건우 윤정희 부부




”(백) 웨딩드레스는 너무 요란해서 우리와 안 맞는 것 같아요. (윤정희를 가리키며) 한복이 너무 잘 어울리잖아요.“

두 사람은 파리 외곽 시골의 자그마한 성당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한 번 더 했다. 윤정희는 ”결혼식 참석자는 결혼 증인을 선 가톨릭 신부 두 명과 우리 둘 뿐이었다. 파리 정착에 도움을 준 신부들인데 참 좋았다“고 회상했다.

신혼여행도 따로 가지 않았다.

”(백)저희는 지금도 ‘우리는 아직 신혼여행 못 갔다’고 이야기해요. 실은 당시 별도로 스케줄 잡기도 쉽지 않고 워낙 연주나 촬영으로 여행을 같이 많이 다니니까 필요성을 못 느껴서 안 간 건데, 숙제가 남아있다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좋아요“

”(윤)그래서 젊은 친구들에게 오히려 신혼여행 가지 말라고도 해요. 그럼 일생 여행 갈 때마다 신혼여행처럼 다닐 수 있다고요.“

친구 소개로 구한 파리 외곽 끌리쉬(Clichy) 근처 7평짜리 아파트에서 신혼집을 차린 두 사람은 딸 진희가 태어난 이후 79년 지금 살고 있는 뱅센숲 근처 아파트로 옮겼다.

● 출산

딸 진희 태몽은 윤정희가 꿨다.

”(윤) 제가 뱀하면 아주 질색을 하는데 뱀이 엉켜서 지구를 이루더라고요. 큰 뱀이 동그라미가 되어요. 꾸는 순간 태몽인 줄 알았죠. 진희가 음력으로 연말에 태어나 용띠거든요.“
파리는 지금도 에어컨을 갖춘 집이 거의 없다. 2층 꼭대기 집은 진희를 임신해 있던 그 해 여름 유난히도 더웠다.

백건우는 자식을 한 명 밖에 낳지 않은 걸 아쉬워했다.

”(백) 나보다 이 쪽(윤정희) 나이가 있었으니까(윤정희가 두 살 연상) 아기를 빨리 가져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리고 진희를 위해서는 둘째가 있으면 좋은데 우리 생활이 여유가 없잖아요. 자식을 키우는 게 자신이 없어지더라고요. 베이비시터를 써 본 적은 없지만 장모님이나 처제들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죠.“

윤정희가 가장 신경 쓴 건 한국어 교육이었다. 아무리 한국 부모 밑에서 자라도 프랑스에는 한국어가 서툰 2세들이 많다. 자식 이야기가 나오자 두 사람은 신이 났다. 영락없는 부모였다.
”(윤)한글 뿐 아니라 한자도 열심히 가르쳤어요. 대학 때는 여름방학 때 연세대 가서 한글 공부도 했죠. 다행히 진희가 스스로 한국어를 잘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아빠가 무의식중에 불어로 이야기하면 ‘아빠 한국어로 해’라고 타박을 주곤 했죠.“

”(백)진희가 프랑스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주곤 했어요. 어느 날 학교에 가보니 프랑스 아이들이 ‘우산 셋이 나란히’ 노래를 한국어로 부르고 있더라고요. 진희가 가르친 거죠.“

진희는 바이올리니스트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둘 다 가르쳤는데 본인이 후자를 택했다. 베르사유 음악원을 거쳐 지금은 디서넝스(dissonance·불협화음) 오케스트라 단원이다. 파리 시외에 살고 있어 자주 보는 편이지만 늘 보고 싶다고 했다.

백건우 백진희 부녀가 프랑스 북부 휴양도시 디나흐에서 함께 공연 연습하는 모습. 사진 제공 백건우 윤정희 부부
백건우 백진희 부녀가 프랑스 북부 휴양도시 디나흐에서 함께 공연 연습하는 모습. 사진 제공 백건우 윤정희 부부


백건우와 진희는 수차례 부녀 공연도 했다.

”(백)여러 장소에서 딸과 함께 공연을 했는데 그냥 참 좋죠. 유럽에서는 가정에서 가족 구성원이 함께 클래식 연주하는 게 생활화되어 있어요. 가족음악회 개념의 ‘패밀리 페스티벌’도 많아요. 한 가족이 다 나와 함께 연주하는 거에요.“

● 납북 미수

진희가 태어난 지 불과 5개월 후 두 사람은 지금도 생각만 하면 몸이 떨리는 아찔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유명한 납북 미수 사건이다.

사건 개요는 이렇다.

백건우 윤정희 부부의 주례를 섰던 이응로 화백의 부인 박인경 씨가 1977년 7월 스위스 한 부호의 연주를 주선했다. 갑작스런 부탁에 수차례 거절했지만 어머니처럼 지내던 분의 청이라 진희를 데리고 두 사람은 함께 스위스 취리히로 떠났다. 갑자기 박 씨는 취리히 공항에서 행선지가 바뀌었다며 당시 공산국가였던 유고의 수도 자그레브로 향했다. 공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한참 간 곳은 어느 시골의 한 3층 저택.

느낌이 이상했던 백건우는 타고 간 택시 운전사에게 기다리라고 한 뒤 집을 둘러보러 들어갔다. 우연히 만난 이웃집 소녀가 먼저 3층으로 올라갔다. 곧이어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뛰어내려왔고 그 뒤에는 한 동양인이 서 있었다. 백건우는 대기시킨 택시를 타고 자그레브 미국 대사관으로 향했고, 미국 영사의 보호를 받으며 파리로 무사히 돌아왔다.

1990년대 한국에 귀순한 김정일 전처 성혜림의 조카 이한영 씨는 ”모스크바 조선노동당 이정룡 대남연락부 1부부장으로부터 직접 이들 부부 납치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북한의 사주를 받은 박 씨의 소행으로 추정되지만 본인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1977년 8월 백건우 윤정희 납치 미수 사건을 다룬 당시 동아일보 보도.
1977년 8월 백건우 윤정희 납치 미수 사건을 다룬 당시 동아일보 보도.


-이응로 화백과는 그렇게 가까웠나요?

”(백)한국 문화계 한 분의 소개로 이응로 선생님 댁을 찾아갔는데 서로 마음이 잘 맞았어요. 그 분이 참 호탕해요. 잘 웃고 친절하고 따뜻하고. 그 나이 드신 분이 이 쪽(윤정희)이 루브르에 산다고 하니 제가 있는데도 거기까지 데려다 주셨어요. 자주 그 집에 가서 밥 먹고 미술 음악 영화 이야기를 나눴는데 정말 즐거웠죠.“

”(윤)우리를 자식 같이 대해주셨어요. 부인 박인경 씨도 얼마나 상냥했는데요.“

백건우는 이 화백은 납북 미수 사건과 무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윤정희는 ”아직도 무섭다“며 당시 이야기를 자세히 하고 싶어 하지 않아했다.

”(윤)그런데 신기한 일이 있어요. 파리에서 취리히로 갈 때 깔깔대고 웃던 진희가 취리히에서 자그레브 갈 때는 타서 내릴 때까지 비행기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울었어요. 몸에 빨간 점이 날 정도로요. 그러다가 탈출해서 자그레브 내 미국 영사관 들어가니까 또 환히 웃더라고요. 5개월짜리 애가 뭘 알았을까“

두 사람은 ”돌이켜보면 하늘이 도왔다“는 말을 수차례 했다.

당시 그 저택에 타고 간 택시를 대기시키지 않고 그냥 보냈더라면…

”(백)자그레브 저택에 도착해보니 완전 시골 허허벌판이에요. 택시가 떠나면 우리는 꼼짝을 못하겠더라고요. 운전사가 트렁크에서 가방을 내리려고 하는데 일단 막았어요. 기사가 영어를 못해서 손짓 발짓으로 다시 트렁크에 넣게 하고 기다리게 했죠.“

마침 미 대사관 도서관이 열려 있어서 구조 요청을 할 수 있었다. 백건우가 고등학교부터 미국에 살며 얻은 영주권은 보호 요청에 큰 도움이 됐다. 마침 미국 영사가 집이 아닌 호텔에 묵고 있어 함께 하룻밤을 보내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맞아떨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지금도 북한에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 6개월 뒤 홍콩에서 여배우 최은희가 납북됐고 뒤이어 그의 남편이기도 했던 신상옥 감독도 북한으로 납치됐다.

아픔을 겪은 백건우는 아직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북한에서 초대한다면 가서 공연할 계획은 있나요.

”(백)저야 언제든 평양에서 공연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어요. 하지만 북한이 먼저 진실된 행동을 해야 해요. 핵도 문제지만 인권 문제가 해결되어야죠. 그렇게 (억지로 소집해서) 몇 만 명 모아놓고 무슨 음악회를 해요. 평화의 제스처로 공연을 할 수 있겠지만 인권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진정한 평화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영화 ‘출국’ 이야기를 꺼냈다. 자진 입북했다가 혼자 탈북한 뒤 두 딸을 그리워하는 오길남 박사의 이야기다.

”출국 영화 덕분에 북한에 남은 두 딸 구명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안타깝죠. 그나마 영화 덕분에 그들은 화제가 됐지만 단 두 명 이잖아요. 그 외에 얼마나 많겠어요.“

그는 다시 한 번 아찔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말했다.

”분단은 우리 인생에서도 하나의 슬픔으로 남아있죠.“

<25일 윤정희의 강렬하고 파란만장한 영화배우 인생스토리가 3회로 이어집니다.>

파리=동정민특파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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