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이잉’ 사무실에 드론이 날아들면…워라밸이 시작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16일 17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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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직장인들이 꿈꾸는 ‘워라밸’(일과 삶 균형). 직장 상사나 사용자들도 취지에 공감하는 아름다운 말이다. 그런데 현실은 녹록치 않다. ‘칼퇴근’이 쉽지 않다. 주52시간 근무와 남녀 구분 없는 육아휴직 사용을 하는 데도 여전히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동아일보 특별취재팀은 우리보다 앞서 워라밸을 고민해온 선진국을 찾아 이들이 어떻게 일과 삶의 균형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직접 들여다봤다. 17일 일본을 시작으로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 대만의 워라밸 사례를 차례로 연재한다.
“위이이이이잉….”

‘또 그놈이 나타났을까’란 생각과 함께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내일 발표할 파워포인트(PPT) 자료는 완성됐나? 저 소리만 들으면 남은 업무량부터 점검하게 된다. 그래, 오늘은 바로 집에 갈 수 있겠다.‘

도쿄 신주쿠에 위치한 일본 경비업체 다이세이((大成)사에 다니는 아이다 유우 씨(38)는 퇴근 시간이 오면 사무실 천장부터 본다. 오후 6시만 되면 ’위이잉‘ 소리를 내면서 ’드론‘이 날아다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워라밸 특별취재팀이 지난해 10월 17일 만난 유우 씨는 우리가 상상하는 전형적인 ’일본 직장인‘의 삶을 살아왔다. 지옥 같은 통근철, 그 안을 채운 넥타이 샐러리맨, 산더미 같은 서류와 야근에 치여 사는….

하지만 유우 씨의 삶은 바뀌고 있었다. 그와 함께 일본 역시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가능한 사회로 변신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유우 씨의 일상이 달라진 건 지난해 4월. 다이세이사에서 ’드론‘을 띄어 야근자에게 퇴근을 종용하는 서비스를 개발하면서부터다. 상용화에 앞서 자사 5층 사무실에서 효과 검증실험을 했다. 매일 오후 6시가 되자 퇴근 안내방송과 함께 거칠게 ’위이이잉‘ 소리가 나면서 ’드론‘이 사무실을 날라 다녔다. 용케도 사무실 곳곳에 설치된 전파발생장치 신호를 받아 장애물을 알아서 잘 피해 다녔다. 드론에 설치된 카메라로 누가 야근을 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죠. 몇 번 드론이 뜨고 나니 다들 그 전에 일을 마치려 노력하게 되더라고요.”(우유 씨)

드론은 직원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당시 사무실에는 총 64명이 일했다. 이중 평균 20명이 하루 평균 3시간, 1개월 중 21일이나 야근을 했다. 드론을 띄우기 시작한 후 4개월이 지나자 야근자 수는 평균 3명으로 줄어들었다. 직원들의 전체 야근시간이 1260시간에서 63시간으로 감소했다.(표 참조)

유우 씨의 일상도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그는 아내와 3살짜리 자녀와 다녀온 오키나와 여행을 떠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귀가 시간이 빨라지니 대화 시간이 늘더군요. 가족여행도 계획하게 돼 오키나와 수족관에 다녀왔어요. 아이들이 난리법석이에요. 이러려고 일도 하는 거겠죠?”

도쿄해상, NTT도코모 등 일본 내 30개 주요 기업들이 드론 서비스 도입을 문의하고 있다.

현재 일본은 ’회사는 제2의 가족‘, ’열혈사원‘이란 표어를 내세우며 개인보다 조직을 강조하는 특유의 기업문화가 많이 희석된 상태다. 2015년 12월 일본의 유명 광고회사 덴쓰의 여사원이 과로에 시달리다 자살한 사건이 기폭제가 됐다. 과다업무 등 근무문제로 자살한 일본인이 2015년 2159명에 달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일하는 방식 개혁‘을 내세웠고 여당은 노동기준법을 개정해 초과 근무 상한을 ’월 45시간, 연 360시간‘으로 정했다.

일본 젊은이들에게는 ’워라밸‘이 이미 직장 선택의 제1의 기준이다. 같은 달 19일 오전 11시 도쿄 카스미카세키 내 스타벅스 커피숍. 케이스케 야노 씨(31)는 스마트폰으로 거래처 계약 관련 자료를 정리 중이다. 그의 사무실은 ’카페‘다. 앱컨설팅 회사에 다니는 그의 하루는 또래 일본 직장인들과 다르다. 하루의 60~70%를 외부에서 보낸다. 회사도 일하는 장소에 관여치 않는다.

“대학졸업 후 야근이 많은 일본대기업에 다녔죠. 하지만 워라밸을 찾고 싶어 지금 회사로 옮겼죠. 당시 ’워라밸 때문에 이직한다‘고 하니 친구들이 이상하게 봤어요. 이제는 제 친구들이 워라밸을 위해 이직을 준비하고 있어요. 종신고용 문화도 많이 사라졌어요. 워라밸을 잘 지키는 외국계 기업에 좋은 인재가 몰려요. 일본기업 경쟁력이 약화될 지경입니다.”

일본의 워라밸 확산은 ’삶의 질‘ 개선은 물론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생산가능인구 감소를 막기 위한 대안으로 여겨지고 있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야근 등 비효율을 없애는 한편 여성과 고령자가 일할 수 있는 근로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다만 워라밸을 정착시키려는 정부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도쿄의 20, 30대 회사원 상당수는 “육아휴직 등 각종 워라밸 제도가 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금융업계에서 일하는 3년차 직장인 키리야마 유우코 씨(34)는 “6시 퇴근을 종용하지만 업무량이 많아 야근을 하지 않고서는 제 시간에 일을 끝낼 수 없다”며 “집에 업무를 가져가 일하면 ’무슨 워라밸을 한다고 난리를 치나‘란 자괴감이 든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은 일본 정부가 고민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동후생성 오우치 아야코 직업생활양립과 기획계장은 “결국 기업의 근로 문화를 바꾸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근로현장에서 워라밸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원인을 ‘제도의 미비’보다는 ‘기업 문화’로 보고 있다. 일본 특유의 수직적 노사관계가 가정친화적 근로환경 조성을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정부가 기업문화 개선을 위한 정책에 힘을 쏟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표적인 예가 ‘워라밸 개선 컨설턴트’다. 일과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에 대해 업무량, 근무인력 분포, 휴가제도 등을 진단한 후 개선 방안을 설계해주는 제도다. 예를 들어 특정 직원에게 업무가 몰려 워라밸이 어려움을 겪는 A기업이 있다면 ‘워라밸 컨설턴트’가 회사 업무를 분석한 후 일이 개개인에게 어떻게 분배되는지를 시각자료로 제작해 보여준다. 직원 스스로 각자의 업무량을 파악하고 적절히 분배하는 근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다.

일본 내각부 남녀공동참획국추진과 코시 누마 아야노 일과생활조화추진실 계장은 “휴가 사용이 어려운 B회사에는 각 부서별 연간 휴가 캘린더를 사무실 한 가운데 설치했다”며 “직원들의 휴가 사용일수를 그래프로 표시하고 직장 상사가 수시로 휴가 소진 그래프를 보면 휴가 사용이 원활해진다”고 설명했다.

일본에서는 ‘이쿠맨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육아(育兒)를 의미하는 ‘이쿠(育)’와 남자를 뜻하는 ‘맨(man)’의 합성어로, 육아에 적극 동참하는 남성들을 일컫는 말이다. 남성육아 휴직 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꾸기 위해 기업을 찾아가 육아 관련 교육을 실시한다. ‘이쿠보스’ 프로그램은 ‘이쿠(育)’와 상사를 뜻하는 보스(Boss)를 합친 말로, 직장 상사가 육아휴직 장려 등을 사내에 선언하는 프로그램이다. 워라밸 정착에는 회사 상사(사장)의 인식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워라밸이 잘되는 회사는 정부가 ‘쿠루밍’ 마크를 준다. 일본어로 ‘포대기’란 뜻이다. 육아, 가정을 의미한다. 기업들은 의무적으로 일 가정 양립을 위한 행동 계획을 후생노동성에 제출한다. 이를 토대로 워라밸 목표를 달성한 기업들에게 ‘쿠루밍’ 인증과 함께 정부사업 조달 등에서 인센티브를 준다.

도쿄=김윤종기자 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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