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호 기자의 우아한]미국은 왜 아테네인들처럼 북한에 약자의 도리를 강요하지 못할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19일 13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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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비핵화 문제를 놓고 북한과 한 해 동안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6월 12일에는 사상 최초로 미국 현직 대통령과 북한 최고 지도자가 싱가포르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그 과정에 남북 정상이 세 차례나 만났고 북중 정상도 역시 세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실무자들이 아닌 정상 간 회담을 통한 비핵화 이른바 ‘탑-다운(Top-Dowm)’ 접근법을 통한 북한 비핵화 가능성에 대해 부풀었던 기대와 달리 북핵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핵심 당사자인 미국과 한국, 북한의 능력(capability)의 문제를 들어 미국이 원하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 그리고 북한이 원하는 체제안전보장과 경제개발의 맞교환이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올해 초부터 주장해 왔습니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북미 정상 간 대타협을 통한 북한 비핵화가 왜 어려운지에 대해 더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 선거가 없는 내년엔 올해처럼 긴박하고 현란한 외교전이 벌어지기보다는 핵심 당사국 내부에서 ‘왜 북한 비핵화가 이리도 어려운가’에 대한 숙의와 고민이 진행될 것이라고 봅니다.

▶ [오늘과 내일/신석호]김정은 공국(公國)

저는 강대국인 미국과 약소국인 북한이 서로 토론을 길게 하면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북한이 ‘미국이라는 최강대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지도 국가들이 하지 말라는 핵개발을 했다’는 점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현재-미래-과거 핵프로그램에 대한 신고 및 폐기 스케줄을 약속하고 미국과 국제사회가 이에 상응하는 대가(미국과의 관계정상화와 경제적 지원 등)를 지원하는 빅딜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강대국 미국은 약소국 미국과 정상회담을 해주는 가장 중요한 카드를 쓰고도 이 문제에 대한 ‘빅딜’을 이끌어 내지 못하고 지루한 토론에 응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토론으로 따지만 북한이 최고수입니다.

현재는 이 토론조차 답보상태인 듯 보입니다. 북한은 미국이 ‘상응조치’를 하면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겠다며 한동안 상응조치로 종전선언을 요구하다가 이것이 먹히지 않자 경제제재 해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신고 및 검증) 전에는 종전선언도, 대북제재도 완화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특히 북한은 미국에 대해 ‘신뢰’를 강조하면서, 강대국 미국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약소국인 자신들은 미국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다고 맞서고 있습니다.

1년 내내 미국과 북한의 지루한 대화를 지켜보면서 기원전 5세기 펠로폰네소스전쟁과정에 있었던 강대국 아테네 군인들과 약소국 밀로스섬 사람들의 대화를 머릿속에 되뇌었습니다. 현실주의 정치학의 시작으로 불리는 역사학자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전쟁사’의 핵심으로 꼽히는 이 대화의 내용과 의미를 대학시절 학부 수업에서 처음 들었지만 지난달 우아한 런칭을 준비하면서야 비로소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습니다. 우선 제가 발췌한 대화의 핵심 내용은 이렇습니다.


핵심한 추렸음에도 다소 긴 아테네인과 밀로스인의 대화를 지금 현재 미국과 북한의 대화에 짧게 대입해 보면 이럴 것 같습니다.

미국: 인간관계에서 정의란 힘이 대등할 때나 통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강자인 우리는 당신들의 비핵화를 요구할 수 있고, 당신들은 거기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쯤은 아실텐데요.

북한: 우리가 보기에는 개별 국가의 자주권이라는 보편적인 선이라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 미국에 이익이 될 것입니다.

미국: 우리는 힘들이지 않고 당신들을 비핵화 시키고 싶소. 우리 둘의 이익을 위해서 비핵화 하길 바라오.

북한: 아무런 보장 없이 비핵화를 하고 자위능력을 잃는 것이 어떻게 우리의 이익이란 말인가요.

미국: 당신들은 비핵화 해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고 경제제재에서 면할 것입니다.

북한: 체제보장과 경제발전을 담보 받지 못하고 비핵화 한다면 비겁한 짓이겠지요.

미국: 살아남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강자에게 저항해선 안 됩니다.

북한: 우리에겐 희망이 있고 김일성 주석님과 김정일 위원장님이 보살펴 줄 겁니다.

미국: 당신들도 우리와 같은 권력을 잡게 되면 우리처럼 행동할 것이요.

북한: 우리의 힘은 미약하지만 중국이라는 동맹이 보충해 주리라 믿습니다.

미국: 중국이 우리와의 세계대전을 감수할 것 같소?

북한: 중국은 바로 우리 옆 나라고 같은 동양인들이요.

미국: 우리가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 중국은 개입하지 못할 것이요.

북한: 그렇다면 다른 지원세력을 구해 줄 겁니다.

미국: 여러 분의 조국은 하나뿐이며 여러분의 존망은 한 번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시오.

펠로폰네소스전쟁사에 따르면 최후통첩을 하고 떠난 아테네인들은 중립을 요구하는 밀로스 섬을 공격해 복속합니다. 힘의 논리에 정의의 논리로 맞섰던 밀로스는 처절하게 파괴되어 현재는 역사 속에만 남아있는 나라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북한은 1993년 제1차 핵위기 이후 최강대국 미국을 대화와 도발로 맞상대하며 생존하고 있습니다. 2016년 이후 2년 동안 핵무력 완성을 외치며 도발을 하다가 올해는 ‘완전한 비핵화’를 내걸고 대화국면을 조성했습니다. 이렇게 약소국 북한이 강대국 미국을 때리고 어르며 핵무력을 강화해 나가는 것을 전문가들은 ‘선군외교’라고 불러왔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나 지금이나 국제사회는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특히 북한은 핵개발을 통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중심으로 하는 미국의 비핵화 및 비확산 레짐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북한의 핵무장을 방치할 경우 제2, 제3의 핵개발 국가를 막을 명분이 없어지고 결과적으로 헤게모니 국가로서의 전략적 도덕적 리더십에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아테네인들이 밀로스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미국이 북한에 약자의 도리를 강요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펠로폰네소스전쟁사로 대학원 한 학기 수업을 진행했던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는 “스파르타와는 달리 중국은 북한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사실상의 동맹국이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북한의 후견국인 중국의 힘 역시 과거 밀로스의 동맹국인 스파르타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년에 수교 70주년을 맞는 중국과 북한은 우호협력조약으로 묶여 있고 서로를 6·25전쟁에서 피를 흘린 ‘혈맹’이라고 합니다. 특히 중국은 미국을 위시한 해양세역이 자신들의 국경까지 오지 못하도록 하는 전략적 완충지대로 북한에 지정학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의 핵개발이 미국의 적대정책 때문이라고 한목소리를 냅니다.

미국이 북한을 압박하지 않을 수 없는 핵개발 자체도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테네 군사들은 말을 듣지 않는 밀로스 섬으로 진격해 점령하면 그만이었지만, 핵무기를 들고 있는 북한을 상대로 미국이 무모한 무력 사용을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규모는 미국보다 적지만 중국도 다량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서울에 몰려있는 돈과 사람들 때문에 핵이 아닌 재래식 무기끼리의 작은 충돌도 엄청난 피해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점이 미국에게는 전략적인 취약성이 되고 있습니다.

동맹과 핵을 믿고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시험하고 있는 북한. 이를 방치할 수 없는 미국. 둘 간의 게임이 어떻게 진행될지 내년에도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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