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안한다” “혼외자 있다”… SNS 소문 ‘짜깁기’ 권여사로 둔갑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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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윤장현 농락한 ‘가짜 권양숙’ 사기행각 전모
전과 5범 50대 김모 여인


“시장님, 예전에 ‘정치 안 한다’고 하셨다면서요.”

지난해 12월 22일 전화 통화를 하던 윤장현 전 광주시장(69)의 눈빛이 흔들렸다. 윤 전 시장은 전날 “딸 문제로 5억 원이 필요한데 빌려주시면 갚겠습니다. 내일 전화를 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의 명의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였다. 윤 전 시장이 전화를 걸자 권 여사를 사칭한 이 여성은 대화를 하던 중 “노 전 대통령 혼외자를 키우는 보호자가 있는데 시장실로 찾아갈 것”이라고 했다.

올해 10월 경찰의 수사로 이 여성이 김모 씨(50)로 밝혀지기 전까지 윤 전 시장은 김 씨를 권 여사로 철석같이 믿었다. 윤 전 시장은 김 씨에게 4억5000만 원을 송금했고, 12차례 통화와 268차례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윤 전 시장이 김 씨를 권 여사라고 굳게 믿은 이유가 뭘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윤 전 시장과 노 전 대통령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윤 전 시장은 조선대 의대 출신으로 광주에서 안과병원을 개업해 30년간 진료하면서 한국YMCA전국연맹 이사장을 지내는 등 활발하게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했다.

노 전 대통령과 윤 전 시장은 1995년 무렵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뒤 종종 만났다고 한다. 윤 전 시장은 2000년 광주 동구의 병원 지하 1층 28m²를 정치인이나 비정부기구(NGO) 관계자와 대화를 나누는 공간으로 꾸몄다. 윤 전 시장의 한 측근은 “노 전 대통령과 윤 전 시장이 병원 지하공간에서 가끔 술잔을 기울였다”고 전했다.

2002년 대선에 출마한 노 전 대통령이 광주를 찾았을 때도 윤 전 시장과 만났다. 윤 전 시장은 노 전 대통령에게 ‘정치에 뜻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두 사람이 나눴던 이 대화를 김 씨가 언급하자 ‘권 여사 맞다’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평소 정치에 관심이 많던 김 씨는 지역 정가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떠돌던 두 사람의 대화내용을 전해 듣고 윤 전 시장에게 ‘아는 척’을 한 것이었다.

전남 순천 출신인 김 씨는 키 165cm 정도에 마른 체형으로 남편과 1남 1녀를 두고 있다. 그는 경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 자신을 “백화점 납품이나 옷가게, 휴대전화 대리점을 하며 생계를 꾸린 주부”라고 말했다. 실제 김 씨는 순천, 대전 등을 떠돌며 장사를 하다 몇 년 전부터 광주에서 휴대전화 대리점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윤 전 시장 사건 전에도 2002∼2011년 지인의 주민등록증을 이용해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린 혐의 등으로 4차례 처벌받은 전력이 있다. 2002년 순천에서 시의원 후보 명함을 돌리다 벌금 50만 원을 선고받기도 했다.

김 씨는 2015년 4월 실시된 재·보선 광주 서을 지역구에 출마한 천정배 후보 캠프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광주지역 정치권에 발을 디뎠다. 이후 국회의원, 광주시장, 구청장 출마자의 캠프를 기웃거린 것으로 전해졌다. 김 씨는 주로 SNS 홍보 파트에서 일했다고 한다. 2014년과 올해 윤 전 시장 캠프에서 일했다는 소문도 있지만 윤 전 시장 측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라고 했다.

김 씨는 윤 전 시장을 대상으로 한 범행에 성공하자 “너무 쉽게 이뤄져 놀랐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올 7∼9월 호남지역 유력 인사 4명에게 사기를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김 씨가 사칭한 인물도 문재인 대통령 내외 등으로 다양해졌다. 김 씨 사기 범행의 타깃이 됐던 A 씨 측 관계자는 “김 씨가 지역의 정치 상황을 자세히 언급하며 처음엔 5억 원을 빌려 달라고 했다가 나중엔 9000만 원까지 액수를 낮췄지만 사기라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경찰에서 김 씨가 조사를 받는 태도도 평범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사를 받던 중 심장 이상을 호소하며 병원에 입원하는가 하면 구속된 뒤에는 한동안 밥을 먹지 않고 커피, 물만 마시며 묵비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검찰에서는 범행을 인정하며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공직선거법 위반과 사기, 사기미수로 구속 기소된 김 씨는 형량을 줄이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그의 변호인은 “김 씨가 법정에서 공소 사실을 깨끗하게 인정할 것”이라고 전했다.

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사기#권양숙#사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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