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적힌 공책만으로 유죄… 내신비리 정황증거 폭넓게 인정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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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고 前교무부장 형사처벌은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 다니는 쌍둥이 딸에게 시험 문제와 답안을 유출한 혐의를 받는 숙명여고 전 교무부장 A 씨(51·구속)는 12일 경찰의 수사 결과 발표 직후 결백을 주장했다. 물증을 확보하지 못한 채 정황만으로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겼다는 게 A 씨 측 주장이다.

본보는 2005년 1월부터 올 10월까지 선고된 전국 중고등학교 교사 학사비리 사건 14건의 판결문 23개를 분석했다. 그 결과 12건에서는 물증 없이 정황과 자백만으로 유죄로 인정됐다. 재판에 넘겨진 교사 23명은 전원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학사비리는 물증을 찾기 어려운 사례가 많다. 서울의 한 여고 수학교사는 학생에게 시험문제를 유출하면서 숫자만 교묘하게 바꿔 예상문제처럼 편집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모의평가 출제위원이었던 한 교사는 출제 지문을 기억해뒀다가 이를 학원 강사에게 전달했다. 이런 사건에서는 교사 본인이 자백하지 않는 한 범행 수법을 알아내기조차 어렵다. 이 때문에 14건 중 11건에서는 물증이 아닌 교사 본인의 자백이 결정적 증거가 됐다. 공범이 먼저 실토하면 교사가 자백하는 패턴이었다.

하지만 숙명여고 사건에서는 공범으로 입건된 A 씨와 쌍둥이 딸이 한 가족이다. 어느 한쪽의 자백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법원은 비슷한 유형의 사건에서 정답이 적힌 공책 등 정황에 기초해 교사의 혐의를 유죄로 판단한 선례가 있다.

과외 교사인 딸에게 시험지를 유출한 서울 송파구의 사립고 교사 B 씨는 2016년 대법원에서 집행유예가 확정됐다. 시험 정답이 빼곡하게 적힌 과외 학생의 공책이 유죄 판단의 근거가 됐다. 업무방해 혐의를 받았던 B 씨와 딸은 “우연히 시험에 나올 문제를 적중해서 가르쳤을 뿐 시험지를 유출한 적 없다”고 혐의를 부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심은 “참고서 내용 가운데 실제 문제로 출제된 단어만 별도로 필기돼 있고, 정답만 따로 모아 정리돼 있다”며 모녀가 시험문제를 유출했다고 인정했다. 항소심과 대법원도 이를 인정했다.

학사비리에 연루된 교사 23명 중 8명에게는 징역 1∼2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특히 금품을 받고 범행한 교사 5명은 모두 실형 판결을 받았다. 개인적 이익을 챙길 의도가 아니었고 범행으로 교직에서 물러났다면 집행유예(9명)나 벌금형(6명)이 내려지기도 했다.

자녀를 위해 범행한 교사가 집행유예로 선처를 받은 사례도 있었다. 2014년 울산의 한 사립여고 교사 C 씨는 딸의 내신 성적을 조작한 혐의가 인정됐지만 실형 대신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됐다. 재판부는 “딸이 입은 상처가 C 씨에게 더욱 가혹한 형벌이 됐을 것”이라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A 씨는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면 실형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이 사건으로 내신 제도에 대한 불신이 커졌고 피의자가 혐의를 부인하는 점이 양형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고도예 기자 yea@donga.com / 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
#내신비리#숙명여고#시험문제 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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