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대원 응급처치, 18년째 막는 규제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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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호흡 등 14가지만 허용돼
구급차 출산때 탯줄 못 자르고 수동 심장충격기 사용도 불법
급성심근경색 사망률, 美의 2배


경기도 내 119안전센터에서 활동하는 구급대원 김모 씨(42)는 숨이 가빠 말을 잇지 못하는 환자를 하룻밤에도 몇 명씩 병원으로 실어 나른다. 환자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의심되면 심전도를 측정해 그 결과를 곧장 병원에 알린다. 이는 현행법상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는 ‘무허가 의료행위’다. 김 씨는 “처벌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지만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가는데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다”고 말했다.

김 씨처럼 처벌을 무릅쓰고 환자를 구해야 하는 구급대원들의 현실(본보 19일자 A1면 참조)이 알려지자 19일 의료계에선 “사람 죽이는 규제의 전형”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이다. 응급구조사인 119구급대원은 심전도 측정뿐 아니라 산모가 구급차 안에서 아이를 낳아도 탯줄을 자를 권한이 없다. 심장이 멎은 환자에게 자동 심장충격기를 사용하는 건 합법이지만 수동 충격기를 쓰는 건 불법이다. 당뇨 합병증으로 쇼크에 빠진 환자의 혈당을 재는 것도 모두 불법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18년 전 개정된 뒤 한 번도 손보지 않은 낡은 법 때문이다. 현행 응급의료법상 응급구조사의 업무 범위는 인공호흡과 수액 투여 등 14가지로 제한돼 있다. 이 밖의 의료행위는 모두 불법이다. 법령에 열거된 것만 허용하는 포지티브 규제다. 어떤 돌발 상황이 생길지 모르는 구급 현장과는 동떨어진 대표적인 ‘나쁜 규제’다.

응급구조사가 처음 생긴 1995년 당시에는 업무 범위가 ‘이송 중 응급처치 및 병원 내 진료 보조’로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 하지만 병원 응급실 일자리를 응급구조사들이 차지하기 시작하자 간호사단체 등의 견제가 시작됐다. 당시 국회 입법조사처의 경과보고서에 따르면 간호사단체가 응급구조사의 병원 내 업무 범위 축소를 요구했고, 보건복지부가 이를 수용하면서 2000년 현행 응급의료법이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응급실과 무관한 119구급대 소속 응급구조사의 업무 범위까지 축소됐다.

그동안 응급의학회 등에선 여러 차례 “구급 과정에 한해 응급구조사의 업무 범위를 넓혀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직역(職域) 갈등의 재발을 우려한 복지부는 소극적이었다. 박능후 복지부 장관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응급구조사의 업무 범위 개정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답했지만 후속조치는 없었다.

그 사이 구급 현장과 법령 간 괴리가 커졌다. 소방청 구급대 업무지침엔 “가슴 통증 환자가 발생하면 심전도를 측정해 이송병원에 알리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사실상 불법을 저지르라는 지침이다. 지난해 전국 구급대원 9772명 중 응급구조사는 7623명(78%), 간호사는 1328명(17.4%)이었다. 의사의 지시 없이 심전도를 측정하려면 임상병리사 자격이 있어야 하지만 정작 임상병리사는 구급대에 지원할 수 없다.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에선 응급상황 시 구급대원이 의사에 준하는 권한을 갖는다. 급성 심근경색 환자가 병원에 도착하기 전 심전도를 측정하는 비율은 미국이 73.2%, 영국이 75.6%였다. 한국엔 관련 통계가 없다. 이런 차이 탓에 입원 30일 내에 숨진 급성 심근경색 환자 비율은 한국이 8.1%로 프랑스(3.9%)나 미국(4.6%)보다 높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119#응급처치#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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