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걸크러시]〈9〉남자로 변장해 장원급제를 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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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백이 웃으며 말하였다. “오늘 밤! 우리 부부가 여기에서 조용히 원앙금침 속에서 즐거이 지내면 내일 돌아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백일이 지나도 여기서 떠나지 않을 것이오.” 그러자 하옥주가 정색을 하며 말하였다. “왕의 이 같은 이상한 행태는 경박한 무리들이나 하는 일입니다. 조금도 왕으로서의 위엄과 태도가 없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고전소설 ‘하진양문록’에서

‘하진양문록’의 여자 주인공인 하옥주가 남자 주인공이자 남편인 진세백에게 하는 말이다. 하옥주는 같이 자자고 보채는 어린아이 같은 남편의 요구를 칼같이 거절한다. 조선시대 여성이라면 남편의 적극적이고도 무례한 애정 공세에 이처럼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응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조선의 많은 여성도 이런 행동을 꿈꾸면서 하옥주에게 부러움이 섞인 공감을 보냈을 것이다.

하옥주는 세 번의 다른 삶을 산다. 그것은 소녀와 남성, 성인 여성의 삶으로 요약할 수 있다. 소녀의 삶을 사는 하옥주에게는 큰 고난이 없다. 하지만 어머니가 죽고 계모 주씨가 들어오면서부터 상황이 변한다. 특히 정혼자인 진세백을 두고 다른 남자와 혼인을 시키려고 하면서 하옥주의 갈등은 깊어진다. 결국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갈 수 없다고 판단한 하옥주는 후원에 몸을 던짐으로써 소녀의 삶을 마감한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진원 도사다. 진원 도사는 물에 빠진 하옥주를 구한 후, 그가 천상에서는 남자였는데 내기 바둑에 져서 결국 여성으로 환생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후 하옥주는 그곳에서 도술과 무예를 연마한 후, 남장을 하고 이름을 하재옥으로 바꾸어 과거에서 장원급제한다.

이로써 남성으로의 삶이 시작된다. 반역을 제압하고, 외적의 침입을 격퇴하는 하옥주의 영웅적 행동이 펼쳐진다. 이 전쟁에는 이미 과거에 급제한 정혼자 진세백도 하옥주의 부하로 참전한다. 진세백은 하옥주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남편이 아내의 명령을 따르는 장면은 남존여비의 조선을 고려할 때 파격적이다. 진세백은 하옥주가 여자임을 알아챈다. “빨리 알고 싶은 것이 있어 가슴을 헤치고 보니 진짜 여자였다. 옥같이 하얀 팔뚝에 처녀임을 나타내는 붉고 둥근 물감이 찍혀 있었다.”

하옥주의 남성 삶은 끝이 난다. 여성 영웅을 그린 고전소설들 가운데 대부분은 여성임이 밝혀지는 부분에서 끝이 난다. 하지만 하옥주는 이후에도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살아간다. 이는 여성이지만 그 능력을 높이 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여자이나 재주와 덕과 충성됨은 이번 세상에는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이 다시없을 것이다. 땅을 주어 봉하고 여총재를 삼아 대궐의 정사를 다스리게 하는 한편 왕실의 여자 친척들을 가르치게 하리라.”

하옥주는 성인 여성의 주체적인 삶을 살아간다. 여성을 능력으로 인정하겠다는 임금의 태도도 흥미롭다. 조선 사회에서 이러한 설정은 파격적이다. 진세백과도 혼인해 가정을 이룬다. 여총재의 역할을 맡은 하옥주는 궁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 사고를 해결한다. 대외 활동에서도 대단한 평가를 받으며 사회적 위치를 확고히 한다. 하옥주는 진정한 여성상을 드러낸 인물이다. 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가정과 부부 관계의 올바른 정립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 슈퍼 커리어 우먼의 원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임치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하옥주#하진양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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