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천주교, 실체있을까…알려진 건 사제 없이 신자만 4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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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년 10월 19일 15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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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종교는 미신, 아편”…주체사상 도입 후 ‘공식기구’ 설립
2008년 기준 4천 명 신자 등록…진실성에는 물음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북이 사실상 결정됨에 따라 북한에서 진행될 종교 행사가 무엇일지도 19일 주목된다.

교황의 방북은 정치적 행보가 아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사목 활동이 병행될 수밖에 없다. 방문 도시 혹은 국가의 천주교 공동체와의 의미 있는 종교 활동이 필요한 것이다.

교황청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부분이 북한의 입장에서는 가장 곤혹스러운 부분일 수도 있다.

<김일성저작선집>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정권 수립 초기 “종교는 미신이자 아편”이라고 ‘교시’한 바 있다.

이 같은 교시에 따라 북한은 사실상 종교 탄압 정책인 반종교정책을 펼쳤다. 이는 북한이 정권 수립 초기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정책을 펼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종교가 부르주아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한다고 비판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과거 월남자들 중에는 북한 정권의 종교 탄압을 피해 내려온 사람도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1980년대 후반 주체사상을 내세운 북한은 종교에 대해서도 변화된 태도를 보인다. 다만 북한은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기보다 필요한 가치만 인정하는 방식으로 종교를 유지해 온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의 사회주의헌법 68조에는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돼 있기도 하다. 68조에는 또 “이 권리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 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된다”며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질서를 해치는데 이용할수 없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북한 천주교의 공식 기구인 조선카톨릭협회 중앙위원회는 1988년 6월 설립됐다. 같은 해 4월 북한의 천주교 신자 홍도숙(세례명 데레사)의 바티칸 교황청 방문도 성사됐다.

일련의 과정을 주도한 것이 북한과 교황청의 협상을 주도할 인물로 지목된 리종혁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겸 조국통일연구원 원장이다. 협회 결성과 함께 북한 정권이 건립한 첫 성당인 장충 성당도 평양에 세워졌다.

북한에는 사제(신부)가 없어 장충 성당은 사실상 천주교에서 말하는 ‘공소(사제가 상주하지 않는 공동체 공간)’로 운영되고 있다.

다만 1988년 서울대교구 장익 신부가 포함된 교황청 대표단의 방문 미사 등 외부에서 사제가 방문해 미사를 집전하는 경우가 있었다. 교황의 방북이 성사되면 장충 성당에서 종교 행사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성당에서 열리는 종교 행사에 참석하는 북한의 신자들은 김씨 부자의 ‘초상휘장(배지)’를 달지 않는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북한의 종교 관련 공식기구 중 카톨릭협회의 창립이 가장 늦었다는 것이다. 조선불교도 연맹은 1945년, 조선그리스도교 연맹은 1946년,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는 1946년 설립됐다.

이에 대해 과거 북한에서 특히 천주교에 대한 탄압의 수준이 높았다는 방증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동시에 북한이 대외 행보에서의 실리 혹은 이미지 개선을 위해 천주교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실제 1991년 소련 해체에 따른 외교적 고립이 예상되자 북한은 ‘교황 평양 초청 TF’를 구성해 교황청과의 접촉을 모색했다는 것이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의 주장이다.

북한은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 때는 김대중 대통령의 제안으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초청했으나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통일부에 따르면 2008년 기준 북한의 천주교 신자는 4000명이다. 해방시기 신자수가 5만 7000명으로 집계된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사제를 포함한 교직자는 ‘0’명이다.

교황청 역시 공식적으로 평양교구장직을 서울대교구장이 대리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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