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우당탕탕]〈10〉호르몬 전쟁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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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요즘 괜히 울적하고 눈물도 많아졌어.”

“나는 요즘 성시경 노래가 그렇게 좋더라.”

지난주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나눈 대화다. 40대 중반이 되고 나니 호르몬에 변화가 생긴 건지 다들 남성 갱년기에 대한 얘기뿐이었다. 예전에는 목이 터져라 건배를 하고 대화보다는 술 마시는 데 집중했는데 요즘은 건배도 별로 안 하고 입이 아프도록 수다를 떨고, 할 얘기가 남았다며 커피숍에 가서 또 수다를 떨고 헤어질 때도 있다. 40대 중반이 되면 정말 호르몬에 변화가 생기는 걸까?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는 친구가 많았다.

“예전에는 액션 영화만 봤는데, 요즘은 멜로 영화가 좋아.”

“나는 땀이 많이 나고, 얼굴이 빨개져. 이것도 갱년긴가?”

언제나 마음은 청춘이겠지만 호르몬의 변화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아내에게도 호르몬 변화가 찾아왔는지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무거운 짐이 있으면 꼭 나보고 도와달라고 했는데 요즘은 식탁도 번쩍번쩍 옮기고, 소파를 옮길 때도 “얼쩡거리면 방해되니까 차라리 나가”라며 혼자 한다. 술 한잔 마시고 들어와서 장난이라도 치려고 하면 주먹이 올라가면서 “확! 빨리 들어가서 자”라고 한다. 아내가 달라진 것도 호르몬 때문일까? 그럼 나는 여성호르몬이 더 많이 나오기 시작한 거고 아내는 남성호르몬이 더 많이 나오기 시작한 건가?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11세 딸에게도 호르몬 변화가 시작됐다. 굉장히 예민해졌다. 친구들과 놀 때면 방문부터 걸어 잠그고, 일기장도 자물쇠로 걸어 잠그고, 방문을 살살 닫아도 되는데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방문부터 쾅 닫고 들어간다. 지난주에는 친척이 놀러왔다가 가면서 딸에게 용돈을 줬다. “용돈 모아서 뭐 할 거야? 사고 싶은 거 있어?”라고 물었다. 인형이나 방탄소년단 관련 상품을 얘기할 줄 알았는데 “모아서 집 사야지. 나도 나중에 크면 집은 있어야 할 거 아니야”라며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빠에게 뽀뽀부터 해주던 딸은 어디로 갔나? 예전에는 엄마에게 혼나면 그 자리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는데 요즘은 잘 울지도 않는다. 아니, 엄마나 아빠 앞에서는 울지 않고 자기 방에 들어가 입을 틀어막고 대성통곡을 한다. 이건 분명, 호르몬 때문에 생긴 변화가 확실하다. 이렇게 온 가족이 호르몬에 변화가 생기다 보니 주말마다 ‘호르몬 전쟁’이 따로 없다.

“우리 멜로 영화 보러 갈까?”

“난 안 가!”

“매운 건 속 쓰리니까 닭 한 마리 먹으러 갈까?”

“그럼 안 가!”

아, 이번 주에도 외식하기로 했는데 뭘 먹으러 가야 전쟁 없이 메뉴를 정할 수 있을까. 분명한 건, 서로의 호르몬을 인정해 주고 배려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호르몬까지 배려해야 하다니, 쉬운 게 없다.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호르몬#변화#갱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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