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한 범죄현장 디테일… 머릿속 장면은 그대로 소설이 됐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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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시대 문화전쟁 글이 무기다]
<2> 노르딕 누아르 작가 제니 롱느뷔의 사건 수첩

스웨덴에서 영화화된 노르딕 누아르 장르의 대표 소설 ‘밀레니엄: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의 한 장면. 3부 ‘벌집을 발로 찬 소녀’는 2010년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다. 충격적 소재, 차가운 현실 감각, 치밀한 구성은 노르딕 누아르의 특징이다. 동아일보DB
스웨덴에서 영화화된 노르딕 누아르 장르의 대표 소설 ‘밀레니엄: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의 한 장면. 3부 ‘벌집을 발로 찬 소녀’는 2010년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다. 충격적 소재, 차가운 현실 감각, 치밀한 구성은 노르딕 누아르의 특징이다. 동아일보DB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그림 같다’고 한다. 생생한 글을 보면 ‘머릿속에 그려진다’고 칭찬한다.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시대, 글과 영상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디테일은 현장감에서 나온다. 걸그룹 멤버에서 스웨덴 강력범죄 수사관으로, 다시 스릴러 소설가로 변신하며 세 번째 인생을 살고 있는 ‘노르딕(Nordic·북유럽) 누아르’ 장르의 인기작가 제니 롱느뷔를 만났다. 치밀하고 현실적인 묘사 위에 독특한 상상력을 더한 북유럽 스릴러 작가와 작품들의 성공 요인을 짚어봤다.》

스웨덴 스톡홀름의 그날 밤은 어둡고 습했다.

피해자는 21세 남성. 수변에 세워진 5인승 경차의 운전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운전석 차창 바로 밖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된 탄환 열두 발은 피해자의 몸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용의자는 뜻밖에도 17세 소년. 스톡홀름 경시청에 비상이 걸렸다. 경시청의 강력 범죄 전담 수사관 제니 롱느뷔(44)는 뇌 쪽으로 빠르게 피가 쏠리는 느낌을 받았다.

롱느뷔는 이 느낌이 싫지 않았다. 단서를 모으고 피의자를 신문하는 것까지, 쉬운 것은 없었다. 처참한 현장과 억센 사람들을 매일 마주하는 일. 여성이 하기에는 너무 터프하다고들 했지만 상관없었다.

스웨덴 전역을 떠들썩하게 한 아동 포르노 사건을 수사할 때도, 스웨덴 TV의 생방송 공개수배 프로그램 ‘애프터리스트’에 출연했을 때도 그랬다. 사람들을 돕는다는 보람이 뇌와 몸을 기분 좋게 움직였다.

○ 팝의 리듬감, 사건 현장의 긴박감이 만든 문장


때로는 관객 8만 명 앞에서 춤출 때의 기분 좋은 긴장감도 떠올랐다. 롱느뷔는 스웨덴 걸그룹 ‘코스모4’의 멤버였다. 북유럽의 차디찬 밤바람을 막아주는 버버리 코트 속에 숨긴 그의 어린 시절은 춤과 노래로 가득했다.

할리우드 영화로 제작되는 ‘레오나 시리즈’를 쓴 스웨덴 작가 제니 롱느뷔
할리우드 영화로 제작되는 ‘레오나 시리즈’를 쓴 스웨덴 작가 제니 롱느뷔
에티오피아에서 태어났다. 거리에 버려졌지만 스웨덴 소도시 보덴의 마음씨 좋은 부부에게 입양됐다. 어려서부터 춤을 잘 췄다. 15세에 댄서로 데뷔해 ‘코스모4’ 멤버가 됐다. 마이클 잭슨의 콘서트 오프닝 무대를 장식한 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걸그룹 생활은 화려했지만 지적 호기심을 누를 수 없었다. 가수 활동을 하며 스톡홀름대에서 법학, 사회학, 심리학을 공부하고 범죄학을 전공했다. 2008년, 범죄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스톡홀름의 화려한 미관, 정비된 사회 시스템 이면에 공존하는 거리의 부랑자나 약물 중독자를 볼 때마다 의문들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왜 같은 환경에 각각 달리 반응하는가’ ‘나는 왜 세계 최빈국에서 태어나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가’.

스톡홀름 경시청에서 7년간 범죄 수사관으로 근무했다. 살인, 강도, 강간…. 강력 범죄만 골라 맡았다. 일은 힘들었지만 사건이 하나씩 해결될 때마다 짜릿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유령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근무 2년째부터 상상 속에 들어온 여성 수사관 레오나의 유령. 경시청 업무와 가족이라는 고달픈 굴레에서 벗어나 때로 범죄에도 가담하는 이중적 캐릭터, 레오나. 롱느뷔 자신을 투영한 이 독특한 가상 인물이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건네려는 듯했다. 소녀 은행강도 올리비아의 환상까지 나타나자 혼란스러웠다.

○ 할리우드까지 사로잡은 ‘롱느뷔 리얼리즘’


“나는 올리비아라고 한다. 일곱 살이다. 내 말을 잘 듣고, 정확히 내가 지시한 대로 움직여라….”

이 머릿속 장면은 그대로 롱느뷔의 첫 소설이자 여성 수사관 ‘레오나’ 시리즈의 1편 ‘주사위는 던져졌다’의 첫 챕터가 됐다.

난생처음 쓴 소설이었다. 집필 막바지에는 1년의 무급휴가를 신청했다. 스톡홀름의 아파트를 팔아 지중해의 작은 섬나라 몰타로 떠났다. 작열하는 태양과 아름다운 해안을 바라보며 머릿속과 펜 끝으로는 춥고 습한 스톡홀름 거리를 더듬었다.

작업은 고됐고 열매는 달콤했다. 무명 신인의 작품이었지만 출판사 열 곳에서 출간 제의가 들어왔다. 롱느뷔는 7년간 몸담은 경시청에 사표를 던졌다. 범죄 수사는 그가 춤과 노래 다음으로 사랑한 일이지만 이제 또 다른 선택이 그를 기다렸다. 전업 작가의 삶이….

책의 각국 표지들. 아래쪽 사진 왼쪽부터 한국어판, 스웨덴어판, 영어판. ⓒMikael Eriksson
책의 각국 표지들. 아래쪽 사진 왼쪽부터 한국어판, 스웨덴어판, 영어판. ⓒMikael Eriksson
3권까지 발간된 레오나 시리즈는 36개국에서 출간됐다. 영화 판권은 할리우드에 팔려 최근 각색이 끝났다. 프로듀서 존 레셔가 이끄는 미국-독일 합작 프로젝트다. 레셔는 2015년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버드맨’의 제작자다.

“성평등 지수가 높은 스웨덴에도 여전히 성역할 고정관념이 존재합니다. 강인한 여성이 갑갑한 사회 통념을 깨부술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했어요. 현실의 저는 실행하기 힘든 기상천외한 일탈과 모험을 레오나를 통해 해보기로 했죠. 제 펜을 움직인 힘입니다.”

○ 영화 보듯 생생한 묘사… 누아르 천국 북유럽

롱느뷔처럼 독특한 상상력의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북유럽 범죄물은 ‘노르딕 누아르’라는 이름으로 세계적 인기를 누린다.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범죄물의 천국이다. 스톡홀름과 오슬로 시내 곳곳의 서점을 둘러보면 베스트셀러 10위 중 9편꼴로 범죄물이다. 영화를 보듯 생생한 묘사, 기괴한 상상을 받치는 치밀한 현실감각이 특징이다.

“스웨덴에서는 페르 발뢰, 마이 셰발의 공저 소설인 ‘마르틴 베크 형사’ 시리즈(1965∼1975년)가 일찍이 전편 영화화됐죠. 이곳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줬습니다.”

스티그 라르손(1954∼2004)의 ‘밀레니엄’ 시리즈는 노르딕 누아르의 독특한 필체를 북유럽권 밖까지 알린 작품이다. 시사월간지 ‘밀레니엄’의 편집장을 내세워 정치권의 부패와 여성에 대한 폭력 등을 현실감 있게 다뤘다. 할리우드에서도 영화화됐고, 라르손 사후 다비드 라게르크란츠가 집필을 이어가고 있다. 노르웨이 작가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형사’ 시리즈도 노르딕 누아르의 저력을 보여준다.

노르딕 누아르는 드라마로도 세계를 누빈다. 독특한 전개로 주목받은 덴마크와 스웨덴 드라마 ‘더 킬링’과 ‘더 브리지’는 미국에서 리메이크돼 큰 인기를 모았다. 아이슬란드의 ‘트랩트’ 역시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 스릴러 마니아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다.

노르딕 누아르의 특징은 서늘함과 리얼함이다. 라르손, 라게르크란츠, 네스뵈 모두 기자 출신. 라게르크란츠가 극찬한 신인, 롱느뷔는 수사관 출신이다. 현장을 기반으로 한 치밀한 물리적·정서적 세부묘사가 작품에 서늘함을 더한 셈이다.

“매일 누군가를 신문해본 사람만이 그려낼 수 있는 디테일이 있죠. 경시청 복도를 매일 오간 사람만 알 수 있는 내부의 암투와 다채로운 풍경도 있고요. 동료 작가들과 늘 하는 말이 있어요. ‘소설은 결코 현실을 이길 수 없다.’”

레오나와 올리비아가 시작한 이야기는 아직 롱느뷔의 머릿속에서 끝나지 않았다. 롱느뷔는 최근 레오나 시리즈 4편을 탈고했다.

스톡홀름·오슬로=임희윤 기자 imi@donga.com
#노르딕 누아르#제니 롱느뷔#레오나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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