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캉스’에 뭐할까? 별미 찾아 훌쩍 떠나는 여행, ‘먹행’으로 소확행!

  • 주간동아
  • 입력 2018년 9월 23일 18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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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정읍시 내장산국립공원의 
갈대 풍경.
전북 정읍시 내장산국립공원의 갈대 풍경.
추석 명절을 생각하면 음식부터 떠오른다. 할아버지에 이어 아버지도 장남이던 우리 집은 기제사와 명절 차례가 매년 줄줄이 이어졌다. 제사 음식 다 먹을 때쯤 명절이 돌아왔고, 그 음식이 떨어지면 다시 제사가 찾아왔다. 내가 서른 살이나 돼서야 어머니는 명절을 포함해 일 년에 딱 4번만 상을 차리게 됐다. 전(煎) 담당이던 나도 약간의 자유를 얻었다. 이후 결혼을 했더니 상 차릴 일이 일절 없는 데다 반갑게 찾아갈 시댁 큰집도 생겼다. 더군다나 천년고도 낭만의 도시 경북 경주다. 드디어 텅빈 서울을 떠나 마음이 훈훈해지는 귀성 여정에 동참하게 됐다. 하지만 경주는 멀었고, 나와 같은 방향으로 이동하는 사람이 인구의 3분의 1은 되는 것 같았다.

이래저래 이쪽저쪽 처지를 두루 경험한 나에게 올해는 색다른 추석이 찾아올 예정이다.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데도 가지 않는 명절이다. 달력을 보니 짧지 않은 연휴다. ‘호캉스’(호텔+바캉스)나 ‘몰캉스’(쇼핑몰+바캉스)도 생각해 봤지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추캉스’(추석+바캉스)이니 그간 그리웠던 곳들을 돌아보고 싶어진다. 고요한 자연이 있는 곳, 그리고 그에 버금가게 맛있는 음식이 있는 곳 말이다.

고요하고 단아한 맛 단풍두부

전남 장성 장성호관광지 산책로.
전남 장성 장성호관광지 산책로.
전북 정읍시 내장산은 가을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내장산성, 남창계곡, 몽계폭포, 입암산성 같은 볼거리와 아름다운 절 백양사, 내장사가 있다. 백양사에서 청류암으로 가는 길은 비자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데 언제나 맑고 한적해 한없이 걸어도 좋을 산책로다. 또한 내장산국립공원 남쪽 장성호라는 인공호수에는 아름다운 풍광을 보며 느릿느릿 거닐 수 있는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다.

단풍두부, 김치, 제육이 들어간 삼합. (왼쪽) 맛이 깨끗한 청국장.
단풍두부, 김치, 제육이 들어간 삼합. (왼쪽) 맛이 깨끗한 청국장.
이름부터 예쁜 단풍두부를 만드는 식당 ‘단풍두부’는 내장산자락 백양사 근처에 있다. 단풍두부는 두부를 만들 때 단풍나무 수액을 넣는 전통 방식의 손두부다. 어머니 손맛이 그리워 두부를 만들기 시작한 식당 주인의 독특한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다. 손두부 특유의 차지고 구수한 맛이 일품인데, 단풍나무 수액이 들어갔다고 맛이 독특하지는 않다. 단, 단백질 위주 두부에 칼륨, 철분 등 단풍나무 수액의 영양가가 보태졌다. 구수한 모두부를 중심으로 수육과 김치를 곁들인 삼합도 있고, 여러 가지 버섯을 넣어 시원하게 끓여 먹는 전골도 맛있다. 거창한 상이 부담스럽다면 짜지 않고 고소한 맛이 좋은 청국장찌개가 제격이다. 밑반찬이 정갈하고 간이 세지 않아 두부 요리와 참 잘 어울린다.

너울너울 구워 먹는 광양식 불고기

갈대가 가득한 순천만 풍경. (위) 전남 순천만 풍경.
갈대가 가득한 순천만 풍경. (위) 전남 순천만 풍경.
전남 순천에 가면 순천만에 안 들를 수 없다. 걷고, 오르고, 하염없이 둘러보고, 감탄하게 되는 곳이 바로 순천만이다. 게다가 가을이면 끝없이 이어지는 갯벌과 유유한 물길, 황금빛 갈대가 어우러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을 이룬다. 특히 가을 순천만과 석양의 조화는 누구의 생에라도 깊게 각인될 만한 장면이라 할 만하다. 한두 시간 머물 요량으로 방문해도 네댓 시간이 금세 흘러 순천만과 허기는 언제나 짝꿍이다. 순천만이 선사한 허기는 ‘3대 불고기’의 광양식 불고기로 달래본다.

굽기 직전 양념에 버무려 나오는 
광양식 불고기. 참숯에 달군 석쇠에 굽는다.
굽기 직전 양념에 버무려 나오는 광양식 불고기. 참숯에 달군 석쇠에 굽는다.
광양식 불고기는 미리 재워두지 않는다. 양념에 재우지 않았는데 간간한 맛이 좋고, 불에 스치듯 살짝 구워 먹으니 녹는 듯이 부드럽다. 그 이유는 고기 손질을 꼼꼼히 하기 때문이다. 고기 사이사이 힘줄과 기름을 모두 떼어내고 살코기를 결 반대로 잘라 칼끝으로 자근자근 두드린다. 양념은 조선간장, 설탕, 참기름, 깨, 소금, 다진 마늘과 파 등을 섞어 만들어둔다. 굽기 직전 양념과 고기를 살살 버무린다. 좋은 숯도 한몫한다. 커다란 화로에 참숯을 그득 담고 잘 달군 석쇠에 한두 점씩만 올려 구워 먹어야 제맛이다.

든든한 땅심이 만들어낸 야생버섯 요리

버섯탕과 깔끔한 맛의 밑반찬들. (위) 버섯탕에는 이름도 생소한 야생버섯이 가득 들어 있다. (왼쪽 아래) 가을에만 잠깐 나오는 별미인 전어밤젓.
버섯탕과 깔끔한 맛의 밑반찬들. (위) 버섯탕에는 이름도 생소한 야생버섯이 가득 들어 있다. (왼쪽 아래) 가을에만 잠깐 나오는 별미인 전어밤젓.
전남 해남의 대둔산 혹은 대흥산이라고도 부르는 두륜산에 가는 이유는 네 가지다. 첫째,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서다. 험난하지만 빼어난 산세를 수월히 구경하며 올라 10분 정도만 걸으면 고계봉 전망대에 도달할 수 있다. 둘째, 일주문에서 대흥사까지 이어지는 멋들어진 길을 걷고 싶어서다. 셋째, 대흥사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여관 유선관에 들르고 싶어서다. 마지막으로 내가 먹어본 것 가운데 가장 맛있는 야생버섯 요리를 먹기 위해서다.

40여 년 동안 야생버섯을 채취해온 부부가 운영하는 버섯 요리 전문점 ‘호남식당’이 그곳이다. 주인 부부가 채취해 손질한 버섯은 자연 표고버섯, 능이버섯, 밤버섯, 참나무버섯, 강강술래버섯 등 이름도 모양도 생소한 것이 많다. 버섯탕에는 얇게 자른 쇠고기, 큼직하게 썬 양파와 고추를 약간 넣고 소금으로만 간한다. 여러 가지 버섯에서 우러나온 자연의 순한 맛과 향이 그만이다. 버섯탕 하나만으로도 호사로운데 밑반찬도 귀한 것 투성이다. 엄나무 순, 녹찻잎 등으로 담근 다양한 장아찌와 산나물로 만든 채소 반찬이 곁들여진다. 운 좋은 가을날이면 전어밤젓도 맛볼 수 있다.

근사한 풍경 담아 먹는 소박한 국수

전남 담양 관방제림.
전남 담양 관방제림.
언제 떠올려도 푸르고 아름다운 곳 전남 담양에는 볼거리도, 먹을거리도 많다. 대나무로 유명한 죽녹원과 한국대나무박물관, 단아하고 빼어난 자태의 송강정과 식영정, 조선시대에 조성된 민간 정원으로는 최고로 치는 소쇄원이 있다. 또한 담양의 명물 떡갈비와 대나무에 쌀 등을 넣어 익히는 대통밥, 그리고 석쇠 돼지갈비로 유명한 ‘승일식당’이 있다.

국수와 달걀로 푸짐한 한 상.
국수와 달걀로 푸짐한 한 상.
하지만 이에 버금가는 멋과 맛은 관방제림에 있다. 관방제는 영산강 둑이며 거기에 팽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엄나무 등을 빼곡하게 심어 2km에 달하는 숲길을 만들어놓았다. 외길이지만 갈 때 올 때 저마다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관방제림에서 향교다리를 건너면 담양국수거리가 이어진다. 40여 년 전쯤 간판도 없이 큰아들 이름을 따 국숫집을 시작한 ‘진우네’가 유명해지면서 국수거리가 형성됐다. 국숫집들은 멸치를 우려 국물을 만들고 소면보다 굵은 중면을 삶아 말아 낸다. 새콤달콤한 고추장 양념의 비빔국수도 있다. 국수와 함께 맛봐야 할 별미는 멸칫국물에 삶은 달걀이다. 국물 맛이 스며들어 은은하게 구수하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 고수의 한과

가을의 경북 울진 불영계곡, 일일이 손으로 모양을 만드는 한과, 기름기가 적어도 부드러운 한약우, 앙증맞은 크기의 약과.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순)
가을의 경북 울진 불영계곡, 일일이 손으로 모양을 만드는 한과, 기름기가 적어도 부드러운 한약우, 앙증맞은 크기의 약과.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순)
어릴 때는 대단해 보이던 것들이 어른이 되고 나면 시시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경북 울진 불영계곡만은 예외다. 아장아장하던 어린 시절부터 휴가차 넘나들던 그곳은 볼 때마다 더 웅장해지는 것 같다. 15km에 달하는 불영계곡은 구불구불 길을 따라가며 보고, 차에서 내려 계곡과 절벽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길가에 늘어선 정자마다 올라가 저만치까지 내려다볼 수 있다. 그리고 아름다운 연못과 전나무 숲길이 있는 불영사도 들를 수 있다.

불영계곡에서 봉화 쪽으로 가다 보면 재미있는 마을이 있다. 바로 닭실마을이다.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둥지를 닮았다고 해 붙은 이름이며 안동권씨 집성촌이다. 이 마을의 부녀회원들이 만드는 ‘닭실종가’ 한과가 명물이다. 특히 공기층이 잘 형성된 유과는 바삭하고 부드러운 단맛이 일품이다. 마을에 들어서면 고소한 튀김 냄새가 나고 한옥 작업장에서는 방방마다 튀기고, 묻히고, 포장하느라 분주하다. 그 와중에 맛보라며 유과와 약과를 섞어 한 접시 담아 내준다. 닭실마을을 지나 도착하는 봉화는 한우가 맛있기로 유명하다. 그중 한약을 먹여 키운 한약우가 있다. 흔히 마블링이 많은 고기는 지나치게 기름지다고 느껴질 수 있는데 한약우는 기름기가 적은데도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봉화읍에 가면 한약우를 맛볼 수 있는 식육식당이 몇 집 있다.

자연스럽고 오래된 도시의 맛

한눈에 보이는 한반도지형.
한눈에 보이는 한반도지형.
강원 영월에 가면 찬찬히 둘러볼 곳이 많다. 어라연, 청령포, 선돌 등 자연이 빚어 놓은 구경거리들이다. 그중 재밌기로는 한반도지형이 으뜸이다. 주천강에 한반도처럼 삼면이 물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의 급경사와 서쪽의 완만함, 땅끝 해남과 호미곶, 울릉도와 독도까지 비슷하게 생긴 지형이 있다. 오간재전망대에 오르면 이 풍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외에 영월역 부근을 거닐면 크고 작은 박물관과 벽화마을을 볼 수 있고, 한밤에는 별마로천문대에 올라 하늘과 별을 바라볼 수도 있다.

구수한 감칠맛이 좋은 다슬기 해장국. (왼쪽) 다슬기가 듬뿍 들어간 부침개도 별미다.
구수한 감칠맛이 좋은 다슬기 해장국. (왼쪽) 다슬기가 듬뿍 들어간 부침개도 별미다.
근사하지는 않지만 맛있는 식당은 영월역 근처와 읍내에 많다. 역 앞에 있는 다슬기 전문점 ‘성호식당’은 50년이 훌쩍 넘었다. 동강과 서강이 만나 남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위치에 있는 영월에는 옛날부터 다슬기가 흔했다. 다슬기로 비빔밥, 무침, 전골, 부침개 등을 두루 만들 수 있지만 최고의 맛은 뭐니 뭐니 해도 뽀얀 국물의 해장국이다. 재첩 부럽지 않게 감칠맛이 넘치고 시원하다. 해장국 한 그릇을 먼저 먹고 영월을 두루 본 뒤 읍내로 돌아와 안주 일체가 있는 숨은 노포를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한강변에서 즐기는 호사와 여유의 맛

부드러움이 남다른 ‘기와집순두부’의 메뉴, 88칸 한옥 카페 
겸 식당 ‘고당’, ‘왈츠와 닥터만 커피’의 커피, 경기 남양주  
북한강변에 있는 ‘왈츠와 닥터만 커피’.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순)
부드러움이 남다른 ‘기와집순두부’의 메뉴, 88칸 한옥 카페 겸 식당 ‘고당’, ‘왈츠와 닥터만 커피’의 커피, 경기 남양주 북한강변에 있는 ‘왈츠와 닥터만 커피’.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순)
호캉스, 몰캉스를 마다한 추캉스인데 호사를 누리고 싶다면 경기 남양주로 향한다. 서울에서 남한강을 끼고 팔당댐까지 달리는 드라이브 코스는 이미 유명하다. 팔당댐을 지나 서종까지 길을 따라 예쁜 풍경이 이어진다. 그 길목에 호사를 누릴 만한 맛집이 있다.

카페와 식당이 함께 있는 ‘고당’은 88칸으로 지어졌으며 안채, 별채, 행랑채로 나뉘어 있다. 식당은 넓은 한실로 돼 있는 반면, 카페는 작은 방마다 테이블이 하나씩 놓여 있다. 따끈한 온돌에 앉아 차를 마시며 오순도순 시간을 보내기에 더없이 좋다.

북한강 경치에 좀 더 빠져들고 싶다면 ‘왈츠와 닥터만 커피’에 가면 된다. 유럽 고성이 연상되는 건물에 커피박물관, 레스토랑 겸 카페가 있다. 커피박물관에는 커피와 관련된 역사와 문화, 희귀한 물건이 가득한데 개인이 수집한 것이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1층에는 강변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는데, 앉아서 마시는 것도 좋지만 강변을 따라 어슬렁어슬렁 산책할 것을 권한다.

마지막으로 70여 년 된 한옥 식당인 ‘기와집순두부’가 있다. 강원과 경기 등지에서 키운 우리 콩으로 만든 순두부가 유명하다. 삶은 콩은 재래식으로 맷돌에 간다. 갈아 나온 콩물은 아주 고운 발에 거른다. 두부 양이 줄더라도 순두부의 부드러운 질감을 살리기 위해서다. 보들보들한 순두부도 맛있지만 재래식 생두부의 고소한 맛도 일품이다. 게다가 두부 만들고 남은 비지는 누구에게나 무료로 나눠준다.

| 글·사진=김민경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156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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