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선 뒤엉킨 ‘기우뚱 전봇대’… 주민 호소에도 1년반 방치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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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골목길 위험천만

서울 중구의 한 골목에 세워진 전봇대. 통신선이 얽힌 채 오른쪽으로 10도가량 기울어 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서울 중구의 한 골목에 세워진 전봇대. 통신선이 얽힌 채 오른쪽으로 10도가량 기울어 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전봇대를 이대로 방치하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태풍이라도 왔으면 큰일 났을 거예요.”

11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골목길. 주택과 식당, 호텔이 밀집해 있어 시민들과 외국인 여행객의 통행이 잦은 곳이다. 그런데 골목 길가에는 높이 6m, 밑지름 약 13cm의 전봇대가 오른쪽으로 10도가량 기운 채 서 있었다. 전봇대가 세워져 있는 콘크리트 바닥도 금이 가 있었다.

전봇대를 살펴본 홍준희 가천대 에너지IT학과 교수는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이 전봇대에는 통신선이 마구 얽혀 있었고 통신선 뭉치는 골목 끝자락까지 100m가량 이어져 있다. 홍 교수는 “전봇대가 넘어지면 행인이나 차량을 덮칠 수 있고 100kg 넘는 선 무더기가 떨어져 골목을 걷던 사람이 다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전봇대에서 각각 60m, 100m가량 떨어진 곳에 설치된 전봇대 2개도 통신선으로 연결돼 있다. 60m 떨어진 전봇대 역시 오른쪽으로 4.5도가량 기울어 있었다. 10도 기울어 있는 전봇대가 넘어진다면 다른 2개의 전봇대도 연쇄적으로 쓰러질 수 있다고 홍 교수는 분석했다. 100m 떨어진 전봇대에는 전기선도 연결돼 있다. 주변 건물의 지붕은 비닐 등 가연성 물질로 덮여 있어 전봇대가 넘어지면 대형 화재와 감전 사고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홍 교수가 “미친 짓”이라는 격한 표현을 쓴 이유다.

골목 주민들은 지난해 4월경부터 지속적으로 중구에 민원을 제기해 왔다. 직접 중구에 민원을 넣었다는 50대 주민 오모 씨는 “전봇대가 너무 많이 기울어 있어 강한 바람이라도 불면 쉽게 쓰러질 것 같아 불안하다”고 말했다. 이어 “구청에 민원을 넣어도 아무 조치가 없다. 상도유치원도 이러다 무너진 것 아니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골목과 인접한 충무파출소는 주민들의 민원을 세 차례 구청에 전달했다. 파출소의 한 경찰관은 “특히 태풍 솔릭이 수도권을 지나갈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던 8월 말 주민들의 걱정이 커서 구청에 민원을 넣었지만 별 조치가 없었다”고 말했다.


사실 중구는 지난해 1월부터 전봇대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전봇대가 누구 소유인지 불분명하고 사유재산이라 강제로 조치할 권한이 없다는 입장이다. 이 전봇대엔 여러 통신사의 통신 케이블이 거치돼 있는데 소유자가 파악되지 않은 상태다. 중구 관계자는 “민원을 접수한 이후 관내 모든 통신사에 ‘위험 전봇대의 정비 및 안전조치를 요청한다’는 취지의 공문을 보냈지만 ‘전봇대가 우리 것’이라고 나선 통신사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마침내 올 7월 A통신사가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전봇대를 다시 세우겠다”고 나섰다. A통신사는 기울어진 전봇대를 뽑아서 다시 설치하고, 통신선의 무게를 분산하기 위해 30m 거리에 전봇대를 하나 더 세우기로 하고 중구에서 굴착 허가를 받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새로 세울 전봇대 근처의 호텔이 반대하고 나섰다. 호텔 관계자는 “전봇대가 설치되면 미관상 안 좋은 데다 소음, 진동 때문에 영업에 방해가 된다”며 “충분한 설명과 설득 없이 건물 옆에 전봇대를 세우는 건 곤란하다”고 말했다. A통신사는 난감한 상황이 됐다. 통신선을 땅 아래 매설하는 지중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A통신사는 “지중화는 최후의 방안”이라고 말했다.

본보가 취재에 착수하자 중구 측은 11일 다시 현장을 둘러보고 새 전봇대를 설치할 다른 장소를 물색하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중구가 전봇대를 강제로 철거하고 새로 세울 권한은 없지만 구에서 적극 나서서 인근 주민들과 조율하면 해결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은지 기자 eunji@donga.com
#전봇대#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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