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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남한은 은행 피서, 북한은 ‘지하철 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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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남한은 은행 피서, 북한은 ‘지하철 피서’

주성하 기자 입력 2018-08-22 03:00수정 2018-08-2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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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파가 붐비는 평양 지하철 ‘영광역’의 내부 모습. 평양역과 연결된 영광역은 평양 시내 지하철역 중에서 내부가 가장 화려하며 외국인들의 단골 참관코스이기도 하다.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올여름 한반도의 기록적 폭염이 가장 끔찍했을 사람들은 아마 북한 주민이 아닐까 싶다. 수치로는 남쪽이 더 더웠지만, 한국은 에어컨이 많아 대다수 사람이 직장과 집에서 헉헉대며 살지 않아도 됐다.

북한엔 에어컨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한 줌도 안 되고 선풍기라도 있으면 다행이지만 전기가 부족하다.

이 와중에 북한은 9월 9일을 맞아 집단체조를 한다며 평양 시민과 학생 수만 명을 불러내 야외 훈련을 시키고 있다. 밖에 10분 서 있어도 땀이 뚝뚝 떨어지는 폭염에 확확 단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꼼짝 못 하고 강제로 몇 시간씩 훈련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나도 예전에 평양에서 겪었던 일이지만, 이 무더위에 그런 훈련은 정신 나간 짓이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남쪽의 은행처럼 들어가 몸을 식힐 데도 없으니 노인들도 고통스럽긴 마찬가지다.

그나마 평양에서 누구나 몸을 식힐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지하철이다. 지하 100m 이상 파고 들어간 지하철은 에어컨이 없어도 시원한 느낌이 든다. 평양 시민에게 여름에는 무더위를 식혀주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몸을 덥혀 주는 곳이 바로 이 지하철이다. ‘소(小)보수날’로 지정된 매월 첫 일요일을 빼고는 항상 운행된다. 게다가 싸기까지 하다. 평양 지하철은 2012년부터 지하철 카드라는 것을 도입했는데, 카드 가격은 쌀 1kg을 살 수 있는 5000원이고 별도로 승차 요금을 충전한다. 하지만 운임이 5원에 불과해 1000원만 충전하면 200번을 탈 수 있다.

평양 지하철은 2개 노선이며, 총길이 34km에 정차역은 16개이다. 아마 요즘도 평양 지하철역마다 무더위를 이기기 위해 들어와 머무는 사람들이 가득할 것이다. 다만 그런 사진은 공개되지 않는다.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외국인이 참관할 수 있는 역은 승리역이나 영광역, 개선역 정도로 제한돼 있고, 이런 역은 통제가 된다.

북한 사람은 지하철에서 동영상과 사진 촬영이 금지된다. 사진 찍다 걸리게 되면 사진기나 휴대전화를 빼앗기는 것은 물론 직장에 통보되고 보안 기관에 불려가는 등 각종 시끄러운 일을 당하게 된다. 아무리 외국인이 우대되고 자국민이 천시되는 북한이라지만 이 문제에 대해선 평양 사람들조차 불평이 크다.

근래엔 지하철에서 휴대전화를 보는 사람이 늘었다. 하지만 지하철엔 통신망이 없어 전화를 할 수 없고 대다수가 미리 내려받은 도서를 보거나 게임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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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 들어가 더위를 식힐 수 있는 시간은 개장 시간인 오전 5시 30분부터 오후 10시 30분쯤까지이다. 평양 지하철은 입장 마감이 오후 9시 30분인데 2년 전쯤 30분이 더 연장됐다.

9시 30분 정각에 평양 지하철을 관리하는 지하철도운영국 군인들이 입구를 막는다. 여단 규모의 이 부대는 평양에서 근무하니 권력자의 자식들이 모이는 ‘꿀보직’이며, 여군의 비율이 높아 ‘임신 사건’이 가장 많이 나오는 부대이기도 하다.

평양 지하철은 ‘누구도 뒤에 남겨두지 않는다(No one left behind)’는 미군의 신조를 떠올릴 만한 독특한 관습이 있다. ‘누구도 지하에 남겨두지 않는 것(No one left underground)’이다.

종점에서 막차는 오후 9시 30분에 들어온 사람이 플랫폼에 올 때까지의 시간을 계산해 9시 45분에 떠난다. 그리고 환승역인 전우역이나 전승역에 와서는 다른 노선에서 내린 사람들을 기다리느라 20분 이상 정차한다. 그래서 막차를 타면 집에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길어진다. 막차를 타면 단 8개 역을 가는 데 1시간 이상 걸리지만, 그래도 걸어가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막차가 지나는 중간 역에선 10시가 넘어도 전철을 탈 수는 있다. 그 대신 9시 30분 이후엔 군인들에게 담배 한 갑 정도는 찔러줘야 한다.

평양 지하철은 전쟁이 나면 평양 시민을 위한 ‘전시 대피호’로 사용하려고 땅속 깊이 뚫었다. 대피호로 쓰인 적은 없지만, 다행히 지금과 같은 무더위 속에선 시민을 위한 ‘폭염 대피소’로 제격이다. 북한 당국이 요즘 같을 때는 전철 운행 시간이 지나도 역사 안에서 무더위를 식힐 수 있게 개방 시간을 늘려주면 찬사를 받을 것이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은 시민과 아이들에게 더위를 먹게 하지 않는 것이다. 요즘 같은 살인 더위에 집단체조 훈련이 웬 말인가.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폭염#대피소#평양 지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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