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진영]안희정은 아직 무죄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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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안희정 무죄 판결 역풍이 거세다.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못 살겠다 박살내자.’ 이런 구호를 내세운 대규모 집회가 주말에 열렸다. 21일 국회 여성가족위 전체회의는 안희정에서 시작해 안희정으로 끝났다. 리얼미터는 20일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최저치를 경신했다는 결과를 발표하며 ‘안희정 역풍’을 원인의 하나로 꼽았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수행비서 김지은 성폭행 사건의 실체는 셋 중 하나다. 14일 나온 1심 판결대로 불륜이거나, 아니면 김 씨 주장대로 성폭력일 수 있다. 김봉수 성신여대 법학과 교수는 ‘김지은이 진실해도 안희정은 무죄일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김 씨는 위력이라고 느꼈지만 안 전 지사는 위력을 사용하지도, 그에 대한 고의가 있지도 않았을 가능성이다. 김 교수는 “사건의 진실은 당사자도 정확하게 모를 수 있다”며 “각자 편견에 따라 당연히 성폭력이다, 불륜이다,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했다.

안 전 지사는 처음부터 유죄였다. 수행비서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인정했으니 도덕적으론 유죄 맞다. 하지만 판결이 확정되기도 전에 성범죄자로 단정하는 건 다른 문제다. 모든 형사 사건에는 ‘무죄 추정의 원칙’(헌법 27조 4항)이 적용되는데 유독 성폭력 사건은 여론재판에서 ‘유죄 추정의 원칙’을 따른다. “당했다”는 주장이 나오는 순간 끝난다. 재판을 받아볼 필요도 없다. ‘피해자’가 거짓말을 할 가능성은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에 쉽게 가려진다.

피해자를 우선해야 하고 성범죄자는 엄벌해야 맞지만 시작부터 가해자를 예단하고 몰아가면 뜻하지 않은 비극이 발생할 수 있다. 32년간 교편을 잡았던 전북의 중학교 교사는 지난해 8월 ‘여학생 성추행 교사’라는 누명을 쓰고 자살했다. 박진성 시인은 2016년 10월 익명의 허위 트위터 게시물 때문에 ‘미성년자 상습 성추행범’이 됐다. 그는 지난달 이를 보도한 언론사를 상대로 낸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이겼으나 “사회적 생명은 이미 끊겼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엔 비슷한 피해자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성무고죄 처벌 강화를 요구하는 청원이 이어지고 있다.

유죄 추정의 원칙은 마녀 사냥의 다른 이름이다. 덴마크 영화 ‘더 헌트’는 2012년 개봉작이지만 미투 운동의 부작용을 경고하는 메시지로 새삼 주목받고 있다. 주인공 루카스는 유치원의 유일한 남자 교사다. 어느 날 여자아이가 루카스에게 기습 뽀뽀를 하고 루카스는 “뽀뽀는 엄마 아빠하고만 하는 거야”라고 주의를 준다. 무안함에 화난 아이는 유치원 원장에게 말한다. “루카스 선생님 싫어요. 고추도 달렸고요.” 원장은 “아이가 거짓말을 할 리 없다”며 루카스를 아동 성추행범으로 단정하고, 다른 아이들도 어른들의 유도 질문에 “미투” 한다. 루카스는 경찰에서 혐의를 벗지만 낙인은 지워지지 않고 ‘사냥감’이 된다.

한국의 루카스, 제2의 시인 박진성이 계속 나온다면 용기 있는 여성들이 어렵게 불을 지핀 미투 운동이 지속될 수 있을까. 미투가 성폭력이 만연한 일상을 바꾸려면 성폭력 혐의자에게도 무죄 추정의 원칙을 인정해야 한다. 평소 몸가짐이 단정한 남자든 손버릇 나쁘기로 소문난 난봉꾼이든 마찬가지다. 잠시 숨을 고르고 ‘성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단체 ‘휴먼연대’의 문제 제기를 들어보자. “언론을 통해 일거에 상대방을 매장시키는 미투 방식은 유효한가? 관련 언론의 책임은? 강력한 변호인단을 구성한 안 전 지사와 달리 다수의 가난한 이들은 성범죄자라는 혐의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안희정 무죄#유죄 추정의 원칙#미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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