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史]〈63〉정승도 ‘돗자리 짜기’ 창업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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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자리짜기. 수원광교박물관
돗자리짜기. 수원광교박물관
“시골 선비는 젊어서 과거 공부를 하다가 합격하지 못하면 음풍농월을 일삼고, 조금 나이가 들면 돗자리를 짜다가 마침내 늙어 죽는다.”

―김낙행 ‘돗자리 짜는 이야기(織席說)’

직장인의 종착지가 치킨집인 것처럼, 조선시대 선비의 종착지는 짚신 삼기 아니면 돗자리 짜기였다. 밑천도 기술도 필요 없다. 조금만 익히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농사짓는 백성은 물론 사찰의 승려도 감옥의 죄수도 모두 돗자리를 짜서 생계에 보탰다. 정승 이원익은 유배되자 친구들의 도움도 거절하고 직접 돗자리를 짜서 먹고살았다.

돗자리는 고려시대부터 유명했다. 송나라 사람 사채백은 ‘밀재필기’에서 고려 돗자리는 값이 비싸 구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뻣뻣한 중국 돗자리에 비해 부드러워서 접어도 상하지 않는 것이 장점이었다. 골풀로 만든 용수석(龍鬚席), 등나무 줄기로 만든 등석(藤席), 꽃무늬를 넣은 채화석(彩畵席)은 중국에서도 고급품이었다. 매년 중국 황제에게 진상한 용무늬 돗자리 용문석(龍紋席)은 하나당 쌀 예닐곱 가마 가격이었다. 청나라 조정의 의전 매뉴얼에 따르면, 황제의 좌석에는 조선에서 진상한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흰 융단을 덮는다고 했다.

지금은 대나무 돗자리를 많이 쓰지만 조선시대에 대나무는 화살대를 만드는 전략물자였다. 이 때문에 대나무 돗자리 사용을 금지한 적도 있다. 서민은 왕골이나 부들, 볏짚으로 짠 돗자리를 사용했다. 강화 교동의 화문석이 명품 특산물로 자리 잡은 것도 이곳이 전국에서 손꼽히는 왕골의 산지였기 때문이다. 가장 구하기 쉬운 재료는 볏짚이었다. 볏짚 돗자리 초석(草席)의 가격은 쌀 두 말 정도였다.

돗자리 짜는 장인을 인장(茵匠), 석장(席匠)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경상도에는 약 1000명의 석장이 있었다. 안동, 순흥, 예천 등 8개 고을에서 매년 1300장을 진상했다. 그 덕택에 왕실의 돗자리를 관리하는 장흥고(長興庫)의 재고가 많을 때는 1만 장이 넘었다. 하지만 중간에서 관리들이 뇌물을 요구하며 트집을 잡아 퇴짜를 놓곤 했다. 그들의 비위를 맞추다 보면 빚더미에 올라앉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웃과 친척까지 빚쟁이에게 시달리는 바람에 석장은 혼처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안동 선비 김낙행(金樂行)은 과거를 볼 수 없었다. 아버지가 죄인의 누명을 벗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다. 과거를 못 보는 선비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보다 못한 아내가 돗자리 짜는 법을 배워 오라고 했다. 첫날은 하루 종일 짰는데도 겨우 한 치(3cm)였지만 점차 속도가 붙어 하루에 한 자(30cm)를 짰다. 나중에는 옆 사람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짤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해졌다. 그는 돗자리를 짜면 다섯 가지 좋은 점이 있다고 했다. 첫째, 밥만 축내는 신세를 면한다. 둘째, 불필요한 외출이 줄어든다. 셋째, 더위와 추위를 잊는다. 넷째, 근심 걱정을 잊는다. 다섯째, 나눔의 행복이다. 그가 선비의 체통을 잊고 돗자리를 짠 덕택에 가족은 물론 노비들도 맨바닥에서 자는 신세를 면했다. 남는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줬다. 선비 김낙행은 돗자리 짜는 노인으로 여생을 마쳤지만 세상에 보탬이 되겠다는 선비의 뜻만은 잃지 않았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돗자리#김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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