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광뒤 아이들 살갗 녹아내려”… 피폭 증언에 韓日학생들 눈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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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학생통신사’ 양국 대학생 20명, 합천군 원폭피해자회관 방문

18일 경남 합천군 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73년 전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해를 당한 안월선 할머니가 ‘성신학생통신사’ 소속 
한일 대학생들에게 증언을 하고 있다. 일본 와세다대 히라사와 유카 씨는 “안 할머니가 마지막에 한국과 일본이 사이좋게 지내달라고 
하셨다.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합천=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18일 경남 합천군 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73년 전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해를 당한 안월선 할머니가 ‘성신학생통신사’ 소속 한일 대학생들에게 증언을 하고 있다. 일본 와세다대 히라사와 유카 씨는 “안 할머니가 마지막에 한국과 일본이 사이좋게 지내달라고 하셨다.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합천=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경. 일본 히로시마(廣島)의 군량미 공장에서 밤샘 작업을 마친 열일곱 살 조선인 소녀는 집에 돌아갈 참이었다. 등굣길 또래 일본 학생들의 놀림을 피하려 옆길로 공장을 빠져나오던 소녀의 손바닥 위로 ‘검은 비’가 떨어졌다. 찰나의 섬광 이후 정신을 차려보니 온 하늘과 땅은 검은 비로 뒤덮여 있었다. 무간지옥 같은 그곳에서 사람들은 웃통을 벗어던지며 ‘아쓰이(뜨겁다)’ ‘이타이(아프다)’를 외쳐댔다.

“햇볕에 서 있던 아이들 살갗이 흐물흐물해지면서 녹아내렸어. 그때 붕괴된 건물에서 터져 나와 얼굴에 박힌 유리조각은 40년 뒤에야 뺄 수 있었어.”

근로정신대 징집을 피해 히로시마로 떠났다가 ‘피폭자’가 된 소녀는 광복 이후인 그해 10월에야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한국인 ‘피폭 증언’에 눈물 흘린 일본인 대학생

18일 한국인 원폭 피해자 안월선 할머니(90)의 증언이 50분가량 이어졌다. 경남 합천군 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 모인 한일 대학생 20명은 숨을 죽인 채 한국말과 일본말이 섞인 안 할머니의 증언에 귀를 기울였다. 증언 도중 학생들 사이에서 탄식과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일본 와세다대에 재학 중인 이시구로 가나에 씨(20·여)는 증언이 끝난 뒤에도 한참을 울먹였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처음 알게 됐다는 그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바로 앞에서 들으니 전쟁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마음이 무거워졌다”며 “일본인을 싫어하실 만도 한데 따뜻하게 대해 주셔서 감사하고 또 죄송하다”고 말했다.

이날 합천을 찾은 학생들은 고려대와 와세다대에서 온 ‘성신학생통신사’로 올해 4년째를 맞았다. 한일 대학생들은 두 나라를 돌며 양국의 아픈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일본 히로시마를 방문해 한국인 원폭희생자위령제에 참석했다. 화정평화재단과 고려대 대학인문역량강화사업(코어사업)이 지원한다.

4년간 성신학생통신사로 활동한 고려대 조성표 씨(25)는 “히로시마에는 원폭 피해자 평화기념관, 추모시설 등이 상당히 잘 갖춰져 있었다. 반면 한국 정부나 시민사회에서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 대한 관심이 적어 아쉽다”고 말했다.

○ 생존 한국인 원폭 피해자 2306명

한국인 원폭 피해자는 10만 명(일본 경시청 추산)에 이른다. 5만 명은 일본에서 숨졌고 4만3000명이 살아남아 귀국했다. 73년이 지난 지금 생존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는 2306명(올 8월 기준)만 남아 있다. 평균 연령은 82세, 최고령 생존자는 올해 100세 생일을 맞았다.

하지만 ‘한국인 원폭 피해자’는 그림자 같은 삶을 살았다. 70여 년간 정부 차원의 실태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 원폭피해자협회에서 확인한 피해자 1133명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합천의 ‘위령각’도 일본 종교단체에서 만든 것이다. 합천에는 원폭 피해 생존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모여살고 있다.

이 협회 이규열 회장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에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고 어린 소녀들은 정신대를 피해 군수공장에 취업했다. 피폭자가 돼 돌아왔지만 조국은 70년간 우리를 잊어버리려 했다”고 말했다.

2011년 8월 헌법재판소는 한국 정부가 원폭 피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 특별법(2017년)이 만들어졌지만 바뀐 것은 별로 없다. 협회 측은 “특별법이 생긴 뒤 실태조사 용역예산 3000만 원 늘어난 게 전부”라고 지적했다.

원폭 피해는 후손에게 대물림됐다. 질병뿐 아니라 ‘피폭자 후손’이라는 낙인은 주홍글씨처럼 남아 있다. ‘대퇴부무혈성 괴사증’이라는 병을 진단 받은 원폭 피해 2세 정모 씨(56·여)는 “어릴 때부터 다리에 힘이 없어 잘 넘어지고 중학생 때부터 빈혈을 앓았다. 여생을 병원에서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적 냉대’도 심각하다. 원폭 피해 3세 강모 씨(28·여)는 지난달 파혼을 당했다. 상대 남성의 부모가 “몸에 무슨 질병이 있을지 모르는데 찝찝하다”며 파혼을 통보한 것이다. 원폭 피해 2세 유모 씨(60·여)는 “국가에서 원폭 피해자를 제대로 치료하고 관리해 왔으면 이런 ‘낙인’이 반세기 넘게 지속됐겠느냐”고 울분을 토했다. 더불어민주당 김상희 의원은 지난해 특별법에서 빠진 원폭 피해자 후손을 지원하는 법안을 14일 대표 발의했다.

합천=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피폭 증언#합천군 원폭피해자회관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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