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이면 버려진 옛 발전소 터 마을에 전세계 젊은이들이 모이는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16일 17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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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헬싱키 시내 북동쪽에 있는, 지금은 폐기된 발전소 터 ‘수빌라티’.

멀리서 보면 공룡 등뼈마냥 흉물스러운 이곳은 매년 이맘때면 음악의 마법으로 되살아난다. 8월이면 약 9만 명(3일간 참석한 인원)의 관객이 유령처럼 들어차 메워버리는 곳. 북유럽에서 가장 뜨겁고 쿨한 힙스터 축제, ‘플로 페스티벌(Flow Festival)’이다. 올해도 이 터에 10개의 무대가 들어섰다. 10~12일, 서울의 답답한 사무실 대신 이곳으로 출퇴근해봤다.

10~12일 핀란드 헬싱키의 버려진 옛 발전소 터인 수빌라티에서 열린 ‘플로 
페스티벌.’ 폐발전소의 굴뚝, 창고, 철제 구조물에 조명과 미술을 더해 디자인 천국으로 자리 잡은 핀란드의 강점을 살렸다. 북유럽
 출신과 여성 음악가에 특화된 출연진도 인상적이다. 플로 페스티벌 제공 ⓒPetri Antilla
10~12일 핀란드 헬싱키의 버려진 옛 발전소 터인 수빌라티에서 열린 ‘플로 페스티벌.’ 폐발전소의 굴뚝, 창고, 철제 구조물에 조명과 미술을 더해 디자인 천국으로 자리 잡은 핀란드의 강점을 살렸다. 북유럽 출신과 여성 음악가에 특화된 출연진도 인상적이다. 플로 페스티벌 제공 ⓒPetri Antilla
플로는 21세기 북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대중음악 축제다. 그 배경에는 상반된 것들의 충돌과 흐름(flow)이라는 뚜렷한 화두가 있다. 플로의 대표 이미지는 푸른 벌판이 아니다. 20층 건물 높이로 우뚝 솟은 4개의 적갈색 옛 발전소 굴뚝이다.

그것이 은유하듯 이곳의 절대 명제는 재생(再生)과 지속가능성이다. 미로처럼 설계된 축제 부지 곳곳에 폐자전거, 폐타이어, 폐컨테이너를 활용한 설치 미술이 들어차 있다. 정제된 건축과 멀티미디어 작품부터 그래피티 같은 길거리 예술까지 포괄한다.

발전소로 상징되는 산업의 후유증을 치유하고, 인본주의 기치 아래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턱과 균열을 없애려고 시도한다. 이를테면 수만 명이 집결하는 어지러운 축제이지만 휠체어와 목발을 쉽게 볼 수 있다. 다른 야외 페스티벌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다. 모든 무대에 장애인을 위한 별도의 통로를 뒀다. 축제 마지막 날 오후는 ‘패밀리 선데이’다. 10세 이하 아동은 무료입장할 수 있고 애니메이션 상영, 체험 놀이 등을 진행한다.

이 축제의 출발점은 가족이다. 플로 페스티벌의 설립자는 수비 칼리오, 토마스 칼리오 씨 부부(43). 각각 공연기획자와 디자인 학도였던 이들은 대안적 대형 축제를 상상하며 2004년 플로를 만들었다. 축제장에서 만난 토마스 칼리오 씨는 “가족을 이루고 자녀를 낳으면서 자연스레 가족이 함께하는 페스티벌, 세대가 소통하는 축제를 상상하고 실행에 옮겼다”고 했다.

3일간 144개 팀에 달하는 방대한 출연진을 꿰뚫는 화두도 세대간 소통이다. 래퍼 켄드릭 라마가 객석을 달구는 한편, 각각 미니멀리즘 음악, 전자음악의 개척자인 테리 라일리(83)와 그룹 탠저린 드림까지 무대에 세운 플로의 안목은 비범하다. 현장에서 만난 한국인 DJ 예지가 “다른 축제에서 본 적 없는 신기한 형태”라고 한 ‘360도 벌룬 무대’에서는 미국 기타리스트 겸 가수 모지스 섬니(28)가 신들린 팔세토 가창과 무대 매너로 프린스(1958~2016)의 환생을 보여줬다.

각각 11일과 12일 출연한 프랑스 가수 겸 배우 샤를로트 갱스부르(위쪽)와 미국 싱어송라이터 모지스 섬니. ⓒKondrukhov Konstantin
각각 11일과 12일 출연한 프랑스 가수 겸 배우 샤를로트 갱스부르(위쪽)와 미국 싱어송라이터 모지스 섬니. ⓒKondrukhov Konstantin
여성 음악가들을 매일 주요 시간대에 배치했다. 덕분에 ‘대중음악 역사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고찰’ 같은 논문을 3일 만에 독파한 듯했다. 펑크 록의 대모 패티 스미스(72)부터 미국 여성 로커 세인트 빈센트(36), 핀란드 가수 알마(22)까지…. 수비 칼리오 씨는 “여성 출연자의 비율을 절반으로 유지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세웠다”고 설명했다.

12일 밤, 발전소 부지를 나서며 내년 8월에 플로를 다시 찾는 상상을 했다. 핀란드 현대 건축의 아버지 알바르 알토의 숨결이 남은 알토대학 캠퍼스, 멀티미디어 갤러리로 재개관한 ‘아모스 렉스 뮤지엄’을 함께 둘러보는 것도 방법이다. 최근 몇 년 새 헬싱키가 전 세계 젊은이들의 새로운 ‘로망 시티’로 떠오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헬싱키=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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