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력에 의한 간음 너무 좁게 봐” vs “피해자 겁박 있어야 성폭력”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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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1심 무죄’ 판사들도 의견 갈려


자신의 지위를 앞세워 수행비서 김지은 씨(33)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53)가 14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자 현직 법관들도 114쪽 분량의 판결문 열람을 문의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올해 초부터 시작된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사건 중 법원 판단이 처음으로 나온 것이어서 관심이 그만큼 높았기 때문이다.

○ “위력 개념 오해” vs “애매하다면 무죄 추정”

공개된 보도자료와 선고문을 놓고 법관들의 견해는 엇갈렸다. 일부 법관은 ‘안 전 지사가 강제 성관계를 할 수 있는 위력을 가졌지만 이를 행사하지 않았다’는 논리를 납득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성폭력 사건을 전담했던 서울고법의 한 판사는 “위력의 존재만으로도 피해자에겐 압박이 될 수 있다. 이를 구분한 논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또 다른 판사도 “유력 정치인인 데다 비서에 대한 임면권도 갖고 있었는데 어디까지 이를 표현해야 위력을 행사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대법원 판례는 유형의 힘뿐만 아니라 무형의 권세나 지위도 위력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이번 판결은 이와는 어긋난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부장판사 조병구)는 안 전 지사에게 ‘업무상 위력’은 있었다고 봤지만 안 전 지사가 이를 이용해 김 씨와 강제 성관계를 한 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반면 재판부 판단이 정당하다는 반론도 있었다. 지방법원의 한 판사는 “성인 피해자에 대해 위력에 의한 간음을 폭넓게 인정하면 자칫 성적 자기결정권을 축소시킬 위험이 있다”고 했다. 위력에 의한 간음을 유죄로 인정한 판례도 피해자가 미성년이나 장애인인 사례가 다수였다. 또 다른 판사는 “피해자 의사에 영향을 미칠 만한 겁박이 있어야 성폭력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의심스러울 땐 피고인의 이익’으로 무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항소심 판단이 바뀔 확률을 놓고도 의견이 분분했다. 안 전 지사 사건에서는 재판부가 김 씨와 안 전 지사 가운데 누구의 진술을 믿느냐에 따라 결론이 뒤집힐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실제 부하 여직원을 간음한 회사 사장 A 씨의 경우 성관계 뒤 보낸 문자메시지에 피해 여성이 답장을 했다는 이유로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항소심은 “거부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다고 해서 진술 신빙성을 부정할 수 없다”며 실형을 선고했고, 이는 대법원에서도 확정됐다. 한 부장판사는 “항소심에서 피해자의 일기장이나 메모 등 당시 심경이 담긴 물증이 나온다면 판도가 바뀔 수 있다”고 했다.

○ ‘비동의 성관계 처벌’ 법 개정 계기 될 듯

조 부장판사가 선고 때 언급한 것처럼 현행 입법체계의 한계 여부를 놓고도 공방이 치열했다. 한 판사는 “현행 법체계에서는 처벌하기 어려운 영역”이라고 했다. 여성변호사회 회장을 지낸 이명숙 변호사는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어떻게 거부했는지 물을 게 아니라 가해자가 어떤 방식으로 피해자의 동의를 구했는지 증명하게 해야 한다. 법을 다루는 판사들의 인식의 변화만으로 바뀔 수 있는 부분”이라고 반박했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외국처럼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를 처벌하는 법 개정 움직임이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영국, 독일,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2000년대 초반부터 ‘비동의 간음죄’를 처벌하고 있다. 올해 초 권력형 성범죄에 대한 ‘미투 폭로’로 관련 법안이 발의됐다. 천정배, 백혜련, 강창일, 홍철호 의원 등 국회의원 53명은 형법상 ‘비동의 간음죄’를 신설하거나 ‘강간·추행의 죄’의 일부 조문을 개정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법안들은 대체로 폭행, 협박이 없어도 상대방 의사에 반해 성관계를 맺는 경우 처벌하는 규정이 포함됐다. 한상훈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비동의 간음’을 처벌하려면 지금의 강간죄보다 낮은 형량으로 도입해야 하는 등 별도의 새로운 구성요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1심 무죄 판결 후 여성단체는 예정돼 있던 집회를 앞당기는 등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운동’은 25일 열릴 예정이었던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 못살겠다 박살내자’ 집회를 18일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 측의 공개 발언도 예정돼 있다. 대전과 전북 전주 등 지방에서도 여성단체의 저항 움직임이 활발하다.

고도예 yea@donga.com·이지훈·김은지 기자
#안희정#무죄#미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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