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donga.com

5·16 - 3당 합당 - DJP연합… 삶 자체가 한국 정치의 자화상
더보기

5·16 - 3당 합당 - DJP연합… 삶 자체가 한국 정치의 자화상

최우열 기자 , 최고야 기자 입력 2018-06-25 03:00수정 2018-06-25 03:28
뉴스듣기프린트
트랜드뉴스 보기
[김종필 1926~2018]파란만장했던 43년 정치 역정
박정희 옆에 JP 박정희 전 대통령(앞줄 오른쪽)이 1962년 1월 20일 서울 태평로 국회별관에 있는 중앙정보부를 시찰하고 있다. 당시 초대 중정부장이던 JP가 박 전 대통령과 나란히 앉아 보고를 받고 있다.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의 43년 정치인생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서 시작해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거쳐 김대중(DJ) 전 대통령으로 마무리된다. ‘영원한 2인자’ ‘풍운아’라는 별명이 붙는 이유다. 산업화 세력으로 시작해 민주화 세력의 손을 잡아가며 한국 정치사를 종횡무진했다. 후배 정치인들은 JP를 “영화로 치면 ‘주연보다 화려한 조연’ ‘막후 기획자이자 감독’이었다”고 평가한다.

○ 5·16 주역이자 초대 중정부장

1961년 서울대 사범대를 거쳐 육군사관학교(8기)를 졸업한 35세의 육군 중령 JP.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군사정변에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파란만장한 정치 역정이 시작됐다.

그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을 벤치마킹해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를 만들고 초대 부장을 지냈다. ‘권력 2인자’에 오른 뒤 1963년 국회에 처음 진출했다. 같은 해 집권 민주공화당의 의장까지 맡았으나 박 전 대통령과 ‘혁명 동기’들의 견제가 시작됐다. 결국 JP는 1964년 ‘6·3한일회담반대운동’의 희생양이 돼 당의장직을 사임하고 외유(外遊)길에 올랐다. 당시 섭섭한 심경을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JP는 1967년 7대 국회로 재입성했다. 4년 뒤에는 국무총리로 다시 2인자에 화려하게 돌아와 4년 6개월을 지냈다. 박정희식 개발 모델의 최전선에 선 것이다. 1979년 10·26사태 직후 공화당 총재를 맡았지만 신군부에 의해 ‘부패 정치인’으로 낙인찍혀 낭인 생활을 해야 했다. 전두환 정부 시절 JP는 DJ, YS와 함께 정치활동 규제에 묶여 11, 12대 총선에 출마하지 못했다.

1987년 민주화의 열기로 치러진 13대 대선으로 정치활동을 재개하면서 1988년 13대 총선 때 신민주공화당으로 충청권을 석권한다. 그러고는 1990년 1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 민주당 총재이던 YS와 3당 합당에 참여해 1992년 대선에서 YS 당선에 기여했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초 YS 민주계로부터 “정치생명이 다했다”며 2선 후퇴 압력을 받았다. JP는 결국 같은 해 3월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 창당으로 정면승부를 건다. JP의 자민련은 그해 6월 지방선거에서 이른바 ‘핫바지론’ 하나로 충청권을 휩쓸고, 1996년 15대 총선에서도 충청권에서 24석을 포함해 총 50석을 얻으면서 정국의 캐스팅보터로서 자리매김한다.

관련기사

○ ‘DJP연합’으로 첫 정권교체

제1차 외유 JP(오른쪽)가 1963년 2월 25일 부인 고 박영옥 여사, 딸 예리 씨와 김포공항에서 ‘자의 반, 타의 반’ 발언으로 유명해진 제1차 외유를 떠나고 있다.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보수세력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호남-충청 연대인 ‘DJP연합’으로 공동정권을 탄생시켰다. 김대중 정부 초대 국무총리에 오르며 두 번째 총리직을 꿰찼다. 하지만 2000년 16대 총선에서 자민련의 의석수는 17석으로 쪼그라들었다. 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한 JP에 대해 DJ는 민주당 의원 4명을 자민련으로 꿔주는 ‘의원 임대’ 파동까지 빚으며 공조 유지에 나섰다. 그만큼 JP와의 연대가 중요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DJ와도 결별하게 된다. 2001년 ‘햇볕정책 전도사’인 임동원 통일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에 자민련이 찬성하면서다. JP가 요구해온 내각제 개헌이 무산된 뒤 DJP연합이 흔들리던 와중에 JP가 임 장관 해임건의안에 찬성하자 DJP연합이 파경을 맞은 것이다.

대일 청구권 담판 1962년 11월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JP가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 만나 대일 청구권 협상을 위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두 사람은 회동 후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를 작성했다. 운정재단 제공
이후 2002년 16대 대선에서 후보를 내지 못한 채 행정수도 이전을 공약으로 내건 노무현 대선 후보와 민주당에 충청권을 대거 잠식당했다. 2004년 17대 총선 때는 “서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 싶다”며 재기를 향한 의욕을 불태웠다.

그러나 총선 직전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공동 추진한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뒤늦게 가담했다가 역풍을 맞아 4석으로 쪼그라든다.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한 자신조차 낙선하면서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

총선 패배 직후인 2004년 4월 19일 그는 “43년간 정계에 몸담으면서 나름대로 재가 됐다”며 정계 은퇴를 전격 선언했다. 5·16군사정변으로 한국 정치사에 등장한 그가 43년간의 정치인생을 접은 날은 아이러니하게도 4·19혁명 44주년 기념일이었다.

최우열 dnsp@donga.com·최고야 기자
#한국 정치의 자화상#김종필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주요뉴스

1/3이전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