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원수]청와대와 가까운 검찰국장… 검찰의 방패? 정권의 창?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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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수 정치부 차장
정원수 정치부 차장
‘혁명적인 인사 태풍이 불어… 검찰 조직을 활성화해 보려는… 이번 인사에서 가장 각광받는 케이스는 법무부 검찰국장으로 발탁된 ○○○.’

영락없이 22일자로 단행된 검찰 인사에 대한 촌평 같다. 하지만 1981년 4월 25일자 동아일보 3면 기사 중 일부다. 전두환 정권이 경력 10년 이상 검사 200여 명에게 반강제로 집단 사표를 받는 천지개벽 수준의 인사를 분석한 기사였다. 당시 정해창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 2차장은 검사장 승진과 동시에 검찰국장이 됐다.

검찰 인사와 제도 개선, 수사 및 정보의 통로인 법무부 검찰국장은 말이 필요 없는 최고의 요직이다. 통상 검사장 3, 4년 차가 맡는 검찰국장을 1년 차에게 바로 맡긴 적이 있는지 수소문해 찾아낸 유일한 선례였다. 정해창은 이 인사를 시작으로 서울지검장과 법무부 차관을 거쳐 5공화국과 6공화국의 법무부 장관, 노태우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까지 지냈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심장”이라는 평가가 나올 만했다.

그러나 정해창도 평검사 시절 “검찰과에서 검찰국장의 ‘가방잡이’ 역할을 했다”고 회고하고, 그 뒤 검찰과장까지 지낸 만큼 법무부 근무 이력이 아예 없는 윤대진의 발탁이 더 놀랍다. 문재인 대통령이 윤대진 검찰국장 카드를 꺼낸 진짜 이유는 뭘까.

미국 월드컵 열기가 한창이던 1994년 여름, 사법연수원생 모임 ‘공을 차는 사람들’(공차사)이 한강 둔치에서 축구 경기를 했다. 한 연수원 동기는 “280여 명의 연수원생 중 30여 명이 소속된 가장 파워풀한 모임”이라고 자랑했다. 여기엔 최전방 공격수 윤대진과 수비수이자 감독 역할을 종종 한 김인회 현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있었다. 1964년생 동갑으로 서울대 법대 83학번 동기인 둘은 학창 시절 운동권에 몸담았고, 입학 10년 만인 1993년 뒤늦게 사법시험에 나란히 합격했다. 진보적 연구모임에서도 함께 활동한 단짝이었다.

윤대진과 김인회는 노무현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도 각각 사정비서관실 특별감찰반장과 법무비서관실 행정관으로 근무했다. ‘적폐청산’ 드라이브의 설계자로 알려진 백원우 민정비서관도 당시 민정비서관실 행정관 출신이다. 이들의 관계를 ‘효자동 술친구’라고 수군대는 검사들이 아직 있다. 직속상관은 당시 민정수석비서관이던 문 대통령이다. 단순히 함께 일했다는 인연을 넘는, 정치적 동질감 비슷한 게 있는 셈이다.

문 대통령이 2011년 김인회와 함께 쓴 ‘검찰을 생각한다’라는 책을 보면 윤대진의 발탁 이유를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암으로 죽어가면서도 다음 보직을 걱정하는 검사”에게 “검찰 개혁을 추진할 때 (활용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무기”가 인사였지만 “개혁성에 문제가 있었던 고위직” 탓에 제대로 쓰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이어 “기득권에 근거한 검사들의 항명”에 정권이 불이익 조치를 하고, “검사들의 불만을 압도할 만한 도도한 논의의 틀이나 흐름”을 통해 검찰을 바꿔야 한다고 처방을 내린다. 노무현 정부 때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청와대가 수사권 조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신설 등을 추진하면서 검찰을 어떻게 대할지 유추할 수 있다.

37년 동안 축적된―또는 잘못된 관행이 누적된―법무 행정 시스템의 상징, 거기에 가장 최적화된 엘리트 검사가 독점해온 검찰국장 자리에 처음으로 이방인이 앉았다. 야전 수사 사령관으로서는 여러 차례 성과를 냈지만 인사와 검찰개혁의 설계자로서는 아직 기대보다는 반신반의하는 내부 시선이 더 많다. “윤대진만 확실한 자기편이고, 나머지는 못 믿기 때문” “수사가 여권으로 향하지 않도록 막는 중앙통제장치”라는 말도 들린다. 그가 외압을 막는 검찰의 방패가 될지, 정권의 창으로서 내부에 칼을 먼저 들이댈지 앞으로의 행보가 벌써부터 궁금하다.
 
정원수 정치부 차장 needjung@donga.com
#검찰 인사#검찰국장#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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