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천재는 어떤 도시에서 탄생하는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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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의 발상지를 찾아서/에릭 와이너 지음/노승영 옮김/512쪽·1만8500원·문학동네

지적 충만함 누린 아테네
‘거대한 실험실’ 실리콘밸리 등 천재들의 흔적 따라 도시 여행
“무질서와 다양성, 감식안… 창조적 지성 길러낸 주요 조건”

낙원과 같은 곳에서야말로 천재들이 대거 배출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천재들의 발상지를 두루 여행해본 저자는 호전적 이웃에 둘러싸였던 피렌체, 허허벌판에 세워진 실리콘밸리, 척박한 땅 아테네 등 오히려 결핍과 마찰 가운데 창조성이 극대화된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한다. 동아일보DB
낙원과 같은 곳에서야말로 천재들이 대거 배출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천재들의 발상지를 두루 여행해본 저자는 호전적 이웃에 둘러싸였던 피렌체, 허허벌판에 세워진 실리콘밸리, 척박한 땅 아테네 등 오히려 결핍과 마찰 가운데 창조성이 극대화된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한다. 동아일보DB
바야흐로 ‘천재들의 시대’다. 요리나 패션 등의 분야를 막론하고 조금만 뛰어나면 ‘천재’란 수식어가 붙는다. 자기계발서들은 모든 사람 안에 천재성이 잠재돼 있다고 부추긴다. 하지만 여행가인 저자는 이런 ‘천재 인플레이션’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모두가 천재라면 아무도 천재가 아니란 뜻 아닌가.

저자는 인류 지성사의 위대한 진전을 이뤄낸 ‘진짜 천재’들의 흔적을 찾아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른바 천재의 지리학적 탐구다. 천재의 흔적을 찾기 위해 택한 도시는 아테네, 항저우, 피렌체, 에든버러, 콜카타, 빈, 실리콘밸리다. 이 도시들의 공통점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창조적 천재들이 득실댄 곳이었다는 점이다.

첫 행선지는 아테네다. 고대 그리스는 공식적으로 186년간 존립했지만 문명의 정점은 24년에 불과했다. 그 찰나가 아테네에서 만개했다. 소크라테스부터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 전무후무한 천재들을 배출했다. 외형적으로 아테네는 위대한 지역이 될 가능성이 낮았다. 바위투성이인 땅은 척박했다. 인구도 적었다.

그런데도 아테네는 번영을 누리며 천재들의 발상지가 됐다. 파르테논 신전을 탐사하고 아테네의 문인, 고고학자, 철학자를 찾아다니며 퍼즐 맞추기를 한 끝에 저자는 그 실마리를 얻는다. 아테네를 위대하게 한 건 산책, 시민의식, 필멸의 운명에 위축되지 않는 당당함, 불확실성과 고통의 포용이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핵심은 ‘단순함’이었다.

천재성은 결코 한 도시에서 지속되지 않는다. 아테네 몰락 후 천재성은 동쪽으로 수천 km 떨어진 항저우에서 발현됐다. 아테네 천재성의 핵심이 ‘단순함’이었다면 항저우엔 ‘전통’이 있었다. 언뜻 창조성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이 ‘전통의 발견과 계승’을 바탕으로 중국의 르네상스였던 송 왕조가 꽃 핀다. 이후 천재성은 ‘부유한 후원자들의 과감한 투자’로 항저우보다 더 장엄한 번영을 누렸던 피렌체, ‘실용성’을 바탕으로 의학과 경제학 등에서 서구 지성을 지배하는 황금기를 누린 에든버러 등으로 이동한다. 저자는 천재성의 이동 행로에 따라 시간과 대륙을 가로지르며 숨 가쁜 탐사를 지속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천재적 도시의 특성이 압축된 미국 실리콘밸리에까지 도착한다.

천재와 천재성을 열망하는 세계는 주목한다. 다음은 어디가 될까. 저자가 각기 다른 특색을 지닌 천재의 발상지를 방문한 후 내린 결론은 ‘무질서, 다양성, 감식안’이다. 창조성은 늘 이 세 가지 조건에서 발현됐다. ‘실리콘밸리 모델’을 베끼려는 각국의 시도가 대부분 성과가 없었던 까닭이다. “나라에서 존경받는 것이 그곳에서 양성될 것이다”라는 플라톤의 말처럼 천재는 인프라가 아니라 문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천재의 발상지는 낙원이 아니며 오히려 결핍과 제약, 마찰 가운데 창조력이 극대화됐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이런 결론은 ‘제2의 실리콘밸리’를 꿈꾸는 도시계획자들뿐 아니라 아이를 천재로 키우고 싶다는 미련을 못 떨친 부모들에게도 시사점이 있다. 실제로 저자는 아홉 살 딸 앞에서 “팬티를 머리에 써 보이는 도식 위반을 실천하거나 녹색 음식을 먹는 새로운 경험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는 것 등으로 아이의 천재성(?)을 깨우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한다.

천재의 흔적을 찾겠다는 저자의 의욕이 낯선 도시를 방랑하는 가운데 표류하다 점점 구체화돼 가는 과정이 구구절절하면서도 위트 있게 그려졌다. 각 도시의 유래나 천재성에 대한 최신 연구, 마윈 등 직접 발품을 팔아 만난 다양한 인물과의 인터뷰가 녹아 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천재의 발상지를 찾아서#에릭 와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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