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상준]일본을 따라잡지 않아도 되는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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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문화 수준 이제 대등해져… 장점 인정하되 당당히 마주서길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일본 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일본 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이 칸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는 기사를 접한 후 큰 상을 받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다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이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공연히 심통이 났었는데, 그 소식을 전한 뉴스 기사에 달린 댓글들 덕분에 아쉬운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이창동과 고레에다가 둘 다 최고의 상을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 없는 감독이라는 쿨한 의견에 고레에다의 이전 작품을 자세히 소개하는 누리꾼도 적지 않았다. 한국의 젊은 세대가 이렇게 성장했구나 하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했다.

고레에다 감독의 수상으로 나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떠올랐다. 1983년 그의 영화가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 일본 영화의 수입이 전면 금지되고 있던 당시의 한국에서도 이 노장 감독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나는 그가 만든 영화를 한 편도 보지 못했지만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거장에게도 영감을 준 대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늘 그의 작품이 궁금했다.

1990년대까지 언젠가 한국에서도 외국 언론의 찬사를 받고 외국 감독에게 영감을 주는 영화감독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 이는 드물었다. 우리가 이창동과 봉준호, 박찬욱을 가지게 될 거라고 그 시절 누가 꿈이나 꾸었을까? 경제든 문화든 일본과 한국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우리 세대는 분하지만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느끼며 살았다.

나는 20년 전 일본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그 간극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 내 또래 일본인 교수들은 스키나 서핑, 스쿠버다이빙 같은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대부분 학창 시절에 배운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해외여행은 물론이고 교환학생을 경험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학창 시절에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돈이 드는 취미를 가진 친구를 본 기억이 없다.

그러나, 지금 20대 한국 청년들은 해외 연수 경험이든 취미 활동이든, 부모로부터의 지원이든 자신의 경제 능력이든 일본 청년에 비해 조금도 뒤지는 것이 없다. 실제로 물가 수준을 고려한 국내총생산(GDP) 통계를 보면 2017년 한국의 1인당 GDP는 일본의 95%에 육박한다. 1980년에는 25%, 1990년에는 40% 수준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변화이다. 우리 세대가 마징가 제트에 열광했듯이 지금 세대의 일본 젊은이들은 방탄소년단(BTS)과 트와이스에 열광한다. 와세다대의 일본인 동료는 중학생 딸이 지민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자민당’을 말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자민’의 일본 발음이 ‘지민’이기 때문이다. 이 애가 벌써 정치에 관심이 있나 했는데, 그 지민은 자민당이 아니라 BTS의 지민이었다.

반면, 최근 한국의 고용시장이 너무 침체하면서 일본을 부러워하고 아직도 우리는 일본에 뒤처져 있다고 믿는 젊은이도 있을 것이다. 일본보다 뒤처진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 청년들 역시 그들 나름의 짐을 힘겹게 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이미 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고, 천문학적인 정부 부채를 짊어지고 있으며 끊임없는 지진의 위협을 상대해야 한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짐을 견뎌내야 하듯이 한국의 젊은이들도 자신들의 짐을 견뎌내야 한다. 한국 젊은이들의 조부모님 세대는 ‘국제시장’의 시대에서 살아남았고, 부모님 세대는 ‘1987’의 시대를 견뎌냈다. 지금 젊은이들은 ‘버닝’의 시대를 이겨 내야만 한다.

우리 세대는 구로사와 감독의 명성은 들어도 그의 영화는 볼 수 없었지만, 요즘 청년들은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를 보는 데 아무 제약이 없다. 그들은 일본 맛집을 기행하고 일본 영화를 평하고 일본 배우의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다. ‘반일’과 ‘극일’ 외에는 일본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없었던 우리는 늘 일본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청년들은 일본을 따라잡을 필요가 없다. 그들은 이미 일본 청년들과 동등한 출발선에 서 있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감독의 수상을 대하는 담담하면서도 당당한 태도에서 나는 한국 청년의 자신감을 본다.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일본 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황금종려상#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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