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상사 갑질-일에 치여… 직장인 55만명 정신질환 치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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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만에 47% 급증


모 중견기업 10년 차 과장인 A 씨는 지방 기술자로 입사했다. 능력을 인정받아 본사 영업부서로 발탁됐다. 그러나 B 본부장이 상사로 오면서 일이 풀리지 않았다. B 본부장은 적자가 예상되자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한 뒤 직원들을 압박했다. 해외 출장을 다녀온 A 씨에게 결과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회삿돈으로 놀러나 다닌다”고 폭언하더니 보고서를 찢고 사무용품을 집어던졌다. 밝았던 A 씨는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연차를 내고 잠적한 A 씨는 자신의 자취방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채 발견됐다. A 씨가 남긴 메모에는 “TF의 책임은 내가 지고 간다”고 쓰여 있었다.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11월 펴낸 ‘직장 내 괴롭힘 대책 마련을 위한 실태조사 보고서’에 담긴 사례다. 보고서는 ‘지나치게 경쟁적인 기업문화’와 ‘성과 위주의 평가’가 A 씨의 죽음을 불렀다고 분석했다.

직장 ‘갑질’과 과도한 업무는 직장인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지속적인 고통을 참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병을 얻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7일 더불어민주당 강병원 의원실이 공개한 국민건강보험공단 ‘2013∼2017년 건강보험 직장 가입자의 정신질환 진료 실인원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정신질환으로 진료를 받은 직장인은 55만8255명이었다. 2013년(37만7876명)보다 47.7%가 늘었다.

정신질환 중에서는 지난 5년간 불안장애(79만9849명), 우울증(73만8820명), 수면장애(61만8812명) 순으로 많았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받은 사람도 1만92명이었다.

직장 ‘갑질’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경우는 최근에도 이어진다. 올 2월 병원 간호사 박모 씨(28·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변 간호사들의 ‘태움(괴롭힘)’ 문화가 한 요인이었다고 유족 등은 설명했다. 박 씨를 추모하는 간호사연대는 12일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박 씨 죽음은 구조적 타살”이라며 집회를 연다.

과도한 업무도 만만치 않다. 올 1월 2일 온라인 강의업체 ‘에스티유니타스’의 웹디자이너 장모 씨(36)는 “내 앞날이 너무 깜깜하다”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메시지를 지인들에게 보냈다. 장 씨는 다음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 씨는 근무기간 2년 8개월의 3분의 1이 넘는 46주 동안 법정 한도를 넘어 연장 근로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회사 이벤트에 동원되거나 원치 않는 ‘필독 도서 읽기’ 등을 했다. 장 씨 누나가 지난해 12월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 근로감독을 청원했지만 “내년에 나가겠다”는 답변만 들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과 대책위는 “장 씨가 업무가 너무 과다해 스트레스를 받아 거의 완치됐던 우울증이 재발했다”고 주장한다. 평소 수면부족에 시달렸고, 휴직하고 복직한 지난해 12월 초에는 탈진 증세도 보였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정보기술(IT) 업계 ‘과로 문화’가 도마에 올랐다. 고용부는 뒤늦게 업체의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를 살펴보는 근로감독에 착수했다.

직장의 각종 괴롭힘이 경찰이나 검찰의 수사로 이어지는 일은 드물다.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벼락 갑질’ 사건은 이례적이다. 강 의원은 “직장인의 정신건강을 보호하려면 직장 내 괴롭힘을 방지할 법과 제도를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이 같은 작업환경으로 인한 정신질환을 산업재해로 폭넓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동혁 hack@donga.com·권기범 기자
#갑질#직장인#정신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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