後農 김상현 민주당 상임고문 별세… DJ와 민주화운동 ‘영원한 동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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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3월 18일 서울 종로구 관철동 민주화추진협의회 사무실에서 공동의장인 김대중(가운데), 김영삼 전 대통령(오른쪽)과 자리를 함께한 김상현 당시 부의장. 동아일보DB
1985년 3월 18일 서울 종로구 관철동 민주화추진협의회 사무실에서 공동의장인 김대중(가운데), 김영삼 전 대통령(오른쪽)과 자리를 함께한 김상현 당시 부의장. 동아일보DB

구두닦이와 신문팔이에서 6선 국회의원을 지내며 민주화 투쟁의 고비마다 전략과 대안을 제시한 한국 정치의 마당발이자 풍운아….

후농(後農) 김상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사진)이 18일 오후 6시 2분 별세했다. 향년 83세. 고인은 지난해 8월 폐암 판정을 받았다. 민주화 운동 당시 고문 후유증으로 재활에 전념할 수 없었던 고인은 입원한 뒤 항암 치료를 받아왔다. 장례는 민주화추진협의회 민주 사회장으로 치를 예정이다.

1935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고인은 16세 때 조실부모했다. 극심한 가난 속에 야간 고교 3학년을 중퇴했다. 그는 “그림 속의 과일도 꺼낼 먹을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독했지만 학문을 동경했고, 친화력과 포용력을 갖췄다는 평을 받았다. 또 다른 정치권의 마당발인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발랄한 생명력과 대의를 위한 열정. 고생스러운 가운데 그렇게 유머러스할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생전 고인은 후광(後廣)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동지적 관계이면서도 긴장관계였다. 두 사람은 DJ가 1950년대 운영한 동양웅변전문학원에서 인연을 맺었고, DJ의 1961년 강원 인제 보궐선거를 도운 뒤로 동교동계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DJ의 지원으로 1965년 30세의 나이에 국회의원에 당선했고, 내리 3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1985년 민추협 시대를 기점으로 두 사람 사이엔 거리가 생겼다. 고인은 DJ가 창당한 평화민주당에 참여하지 않고, 1987년 대선에서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도우면서 반목했다. 대선을 앞두고 DJ에게 후보 단일화를 양보하라고 한 게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YS의 3당 합당 합류를 거절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와 함께 ‘꼬마민주당’에 남으며 파란만장한 정치사를 이어갔다. 16대 총선에서 DJ의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국회에 들어가겠다”고 한 말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결국 2002년 국회의원 보선에서 지역구를 서울 서대문갑에서 광주 북갑으로 옮겨 당선됐다.

후농이 야당 정치인으로 겪은 시련과 성취는 그 자체가 현대사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안이 통과되자 울부짖으며 투표함을 내던졌다. 유신 때 말소된 고인의 공민권(公民權)은 17년 만인 1988년 회복됐다. 신군부 쿠데타 때는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정대철 민주평화당 고문은 “대단히 적극적이고 개척정신이 높으신 분이었다”며 애도했다.

생전 고인은 호 ‘후농’에 대해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으로 수감 중일 때 고은 시인이 지어준 것”이라고 했다. 젊은 나이에 고생했으니 생의 후반부는 농사를 지으며 평화롭게 살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DJ의 ‘후광’을 따라 지었다는 말도 있다. 또 다른 호는 무경(無境). 경계가 없다는 뜻이다. 막내아들인 민주당 김영호 의원은 “생전 아버지는 ‘무경’이라는 호를 더 좋아하셨다”고 했다.

고인과 오랫동안 교류한 동교동계 ‘특무상사’로 통하는 이훈평 전 의원은 “후농이 하늘나라에서 후광에게 ‘형님, 저도 왔습니다’라고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고인은 부인 정희원 여사와 슬하에 3남(윤호, 준호, 영호) 1녀(현주)를 뒀다. 빈소는 서울 세브란스병원(02-2227-7500), 발인은 22일, 장지는 경기 파주시 나자렛묘역.

장관석 기자 jks@donga.com
#김상현#별세#김대중#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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