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도장 출근 없앴더니… 눈치는 줄고 협업 늘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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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행복원정대:워라밸을 찾아서]2부 일하는 방식이 확 달라진다
<4> 자율성과 효율성은 비례

14일 오후 4시 아직 해도 떨어지지 않은 시간. 서일환 넷마블게임즈 품질관리(QA)실 팀장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유치원에서 기다릴 딸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딸과 함께 집으로 가 저녁 내내 놀아줄 생각이다.

매일 오후 4시에 퇴근하는 것은 아니다. 내일은 오후 7시까지 근무할 생각이다. 출근 시간도 그때그때 다르다. 오늘은 오전 10시, 내일은 오전 8시인 식이다.

어떻게 이런 근무가 가능할까. 넷마블은 13일부터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시작했다. 이날이 시행 이틀째였다. 의무근로시간인 오전 10시∼오후 4시(점심시간 1시간 포함)를 제외하고 나머지 업무시간은 개인이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한 달 동안 총 근로시간이 평균 주 40시간을 넘지 않는 범위 안에 있으면 된다.

서 팀장은 “선택적 근로시간제 덕분에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딸 아이 유치원 등하교를 맡을 수 있게 됐다. 이전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라고 말했다.

○ “신작 늦어져도 업무문화 개선”

16일 오후 5시경 서일환 넷마블게임즈 품질관리(QA)실 팀장이 사무실 문을 나서고 있다. 이 회사는 핵심 의무근로시간(10~16시)을 뺀 나머지 시간 중 출퇴근 시간을 자율적으로 정해 일하는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이달 13일부터 실시하고 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16일 오후 5시경 서일환 넷마블게임즈 품질관리(QA)실 팀장이 사무실 문을 나서고 있다. 이 회사는 핵심 의무근로시간(10~16시)을 뺀 나머지 시간 중 출퇴근 시간을 자율적으로 정해 일하는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이달 13일부터 실시하고 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서울 구로구 디지털로에 위치한 넷마블게임즈는 게임업계에서 ‘구로의 등대’로 불렸다. 워낙 야근이 많아서 깜깜한 밤에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2016년 직원 과로사 문제가 불거져 지난해 경영진이 국정감사장에 불려가는 수모를 겪은 바 있다.

그랬던 넷마블이 1년 새 몰라보게 달라졌다. 지난해 2월 게임업계 최초로 야근, 주말근무를 금지하는 ‘일하는 문화 개선안’을 발표했다. 최근에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전격 도입하면서 사전 연장근로 신청자를 제외하고는 야간, 휴일은 물론 월 기본 근로시간에 연장근무도 금하고 있다.

‘일하는 문화 개선안’이 나온 지 1년, 넷마블의 주간 초과근로시간은 지난해 3.3시간으로 전년(4.8시간)보다 약 31% 줄어들었다. 지난달 본사 19층에 있던 ‘야근의 상징’ 수면실은 간호사 등이 상주하는 보건실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에는 경영진 의지가 담겨 있었다. 권영식 넷마블 대표는 “게임 출시 시기를 늦추는 일을 감수하고서라도 일하는 문화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실제 넷마블은 지난해에는 계획했던 17종의 신규 게임 중 5종만 내놨다.

한 넷마블 직원은 “서버 점검의 경우 그동안은 매출 극대화를 위해 유저 이용이 적은 야간에 해왔다. 하지만 경영진이 시간대를 과감하게 주간으로 바꿨다. 비용을 들여 1대 쓰던 서버를 2대로 늘렸다”고 말했다.

○ 평가제도 바꾸면 눈치가 사라진다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도입한 또 다른 회사인 한국마이크로소프트(MS). 7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소재 사무실에는 한창 일할 시간임에도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박현진 한국MS 마케팅본부 부장은 “어디서든 일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부장 본인도 일주일에 한 번은 재택근무를 한다. 팀장에게는 “저 내일 집에서 일해요”라고 e메일을 보낸다. 당일 전화해 통보할 때도 있다.

이 회사는 일찌감치 출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가장 일하기 좋은 장소에서, 좋은 시간대에 일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회의는 어떻게 하냐고? 화상 회의 기능을 담은 ‘스카이프포비즈니스’를 쓴다. 한 직원은 “화상 회의할 때 뒤로 보이는 배경이 가관이다. 배우자가 설거지하는 모습도 봤다”며 웃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이지만 처음부터 자율 근무가 정착됐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문화 특성상 상사 눈치를 봐야 했다. 자율근무를 완전히 자리 잡게 한 것은 ‘평가제도’였다.

한국MS는 2013년 11월 강력한 성과는 구성원 혼자서만 이뤄낼 수 없다는 생각에 평가 제도를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바꿨다. 원래는 ‘판매 목표 ○○% 초과 달성’ 같은 성과 위주였다. 그러다 보니 서로 경쟁하느라 성과 좋은 스타 직원과 같은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것을 꺼렸다. 여러 부서 관리자가 모여 부하 직원들을 평가하니 다른 팀 관리자에게 ‘눈도장’ 찍으려는 사내정치도 중요했다.

현행 절대평가제에서는 추상적인 의미의 ‘영향력’이 평가항목에 들어갔다. 혼자 성과를 잘 내는 직원보다 동료 성과를 적극적으로 돕는 구성원이 인센티브를 더 받는 구조가 됐다. 팀에서 협업을 잘하면 되니 ‘눈도장 출근’은 필요 없게 됐다.

이승연 한국MS 커뮤니케이션팀 부장은 “경쟁보다 팀에서 협업이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됐고 구성원 간에 신뢰하는 분위기로 자리 잡게 됐다”고 말했다.

 

▼ ‘나인 투 식스’는 옛말… 하루 4시간 근무도 가능해져
SKT-LG전자-엔씨소프트 등 ‘자율 출퇴근제’ 잇따라 도입

‘나인 투 식스(9 to 6)’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기존에는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하는 기업이 대부분이었다. 최근에는 개인이 알아서 출퇴근 시간을 정하는 제도가 속속 도입 중이다. 가장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을 때 일하자는 취지다. 근로시간 단축에 따라 일이 없는데도 관성적으로 남아 있던 관행을 없애자는 의미도 있다.

SK텔레콤은 SK 계열사 중 처음으로 자율적 선택근무제를 채택했다. 2분기(4∼6월) 중에 2주에 80시간만 맞추면 원하는 시간에 근무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한 주는 30시간, 다음 한 주는 50시간 등의 방식으로 근무를 조정할 수 있게 됐다. SK텔레콤 관계자는 “주 4일 몰아서 일하고 나머지 하루는 여가활동을 즐길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LG전자는 하루 4∼12시간 근무해야 한다는 조건을 두고 주 40시간 근무를 지난달 26일부터 시범 운영하고 있다. 중요한 업무가 있는 날은 최대 12시간까지 일할 수 있고, 휴식이 필요하면 4시간만 근무하고 퇴근하는 방식으로 근무시간을 조율할 수 있다. 엔씨소프트는 1주 40시간 근무를 원칙으로 하면서 출퇴근 시간을 유연하게 설정할 수 있는 유연출퇴근제를 올해 1월부터 시범 운영하기 시작했다.

재계에서는 프랑스 스웨덴 독일 등 선진국처럼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을 6개월∼1년으로 늘려달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업무 특성상 집중적으로 근무해야 하는 기간이 한두 달이 넘어가는 부서도 있는 현실을 반영해 달라는 취지다. 재계 관계자는 “연구개발 직군은 제품 출시를 앞두고 몇 달은 강도 높게 일해야 하는 특성이 있다. 법정 근로시간을 주간이 아니라 분기 혹은 연간 단위로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 경영잡학사전 : 유연근무제 종류는
주당 최대 52시간 범위내 상황따라 선택 적용 가능


업종별 직무별로 출퇴근 시간을 유연하게 적용하는 유연근무제. 근로기준법(개정안)상 어떤 제도를 활용할 수 있을까.

▽탄력적 근로시간제=2주, 3개월 단위로 평균 주 40시간(최대 52시간)을 맞추면 된다. 성수기에 몰아 일하고 비수기에 몰아 쉬라는 취지다. 활용도가 높지는 않다. 노사 합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노조 입장에선 성수기에 연장근무해 수당을 받고, 비수기에는 정시 근무체계를 유지하는 게 임금 측면에서 유리할 수 있다. 단위 시간이 2주, 3개월이라 적용이 애매하다는 말도 나온다. 에어컨 제조 라인의 경우 가장 바쁜 시기는 최소 4∼7월로 4개월가량이다.

▽선택적 근로시간제=정산시간 내 평균 주 40시간(최대 52시간) 범위에서 회사가 정하는 의무근로시간 외에는 출퇴근 시간을 근로자가 정할 수 있다.

▽재량근로제=기자, 디자이너, 연구개발자 등 시행령이 정한 일부 직군은 업무수행 방법과 시간 배분 문제를 본인의 재량으로 결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밖에서 취재하는 ‘김 기자’의 근무 시간은 측정하기 어렵다. 회사와 그는 업무 수행에 주 50시간 걸린다고 서로 합의하고, 그는 재량껏 일할 수 있다.

신무경 기자 yes@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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