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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앞에서 “머리 ×만 찼나” 폭언… 교육 빙자한 대물림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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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앞에서 “머리 ×만 찼나” 폭언… 교육 빙자한 대물림 폭력

조건희 기자 , 김하경 기자 , 이진한 의학전문기자·의사입력 2018-02-21 03:00수정 2018-02-2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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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 절벽 내모는 ‘태움 문화’]전·현직 간호사 10명에게 들어보니 《 사람을 살리겠다며 나이팅게일 선서를 한 간호사 2명이 연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선배 간호사의 괴롭힘, 이른바 ‘태움’을 견디지 못해서였다. 2005, 2006년의 일이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간호사의 세계는 나아지지 않았다. 대한간호협회가 조사해 보니 간호사 10명 중 4명은 지금도 태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15일 한 대형병원 간호사의 자살을 계기로 동아일보가 심층 인터뷰한 전현직 간호사 10명 중 2명은 태움 탓에 한때 자해까지 고민했다고 털어놨다. 》
 

1년 차 간호사 A 씨(24·여)는 19일에도 하루 종일 가시밭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직속 선배(프리셉터)는 A 씨의 사소한 실수를 꼬투리 잡아 “너 머리 안 좋니”라며 폭언을 퍼붓다가 아예 투명인간 취급을 했다. 퇴근시간이 벌써 지났지만 A 씨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선배가 입을 열 때까지 선배 뒤만 졸졸 따라다녀야 했다. 새벽별을 보고 출근해 결국 달빛을 보며 퇴근한 A 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가끔 출근하다가 차에 치여 입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 쉴 수 있으니까”라고 말했다.

○ “쉬는 날에도 전화해 다짜고짜 욕설”

설 연휴가 시작된 15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학병원 간호사 B 씨(28·여)가 숨지기 전 선배로부터 지속적으로 ‘태움(괴롭힘)’을 당해 왔다는 주장이 나오자 간호계에선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전·현직 간호사 10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 가장 흔한 태움의 유형은 폭언이었다. 대한간호협회가 간호사 727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흔한 태움 유형은 △고함과 폭언(62.7%) △험담이나 안 좋은 소문 퍼뜨리기(47%) △비웃음거리로 삼기(44.5%·중복 응답) 순이었다.

폭언과 폭행은 주로 근무 교대시간에 벌어진다. 직속 선배와 단둘이 대면하는 시간에 교육이란 미명 아래 각종 질책이 쏟아지는 것이다. 간호사실로 불러 혼내는 건 그나마 낫다. 간호사 C 씨(24·여)는 환자 앞에서 선배로부터 “머리에 똥만 찼냐”는 폭언을 들어야 했다. 3년 차 간호사 D 씨(33·여)는 서류판으로 머리를 맞은 적도 있다.

퇴근 후에도 태움에서 자유롭지 않다. E 씨(29·여)는 쉬는 날에도 “왜 건강보험을 정확히 청구하지 않았느냐”거나 “기록부가 깔끔하지 않다”는 등 사소한 실수를 지적하는 선배의 전화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다. 선배가 바뀐 근무표를 일부러 전달하지 않아 쉬는 날에 출근한다거나 근무일이 아닌데도 나와서 일손을 보태라고 강요받은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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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대물림 구조

간호사들 사이에선 작은 실수가 환자의 생명과 직결될 수 있는 업무 특성상 신입을 엄격하게 교육할 수밖에 없다는 반론도 있다. 문제는 수십 년간 지속된 태움 문화가 교육 효과를 높이는 데 방점이 있다기보다 후배에 대한 선배의 갑질로 변질됐다는 점이다. 단순히 괴롭히기 위한 태움이 잦다는 얘기다.

선배의 시범을 한번에 정확하게 따라하지 못하면 질책하는 등 꼬투리잡기식 교육이 주를 이룬다. 일부 병동에선 새 간호사가 들어와야 기존 간호사가 ‘태움 타깃’에서 벗어난다는 말도 나온다. 의대 교수가 전공의를 폭행하는 의사 사회의 오랜 악습과 닮은꼴이다. 한 원로 간호사는 “최소한 50년 전부터 현장에서 태움이라는 단어가 쓰였다”고 말했다.

지속적인 태움을 견디려다가 몸과 마음을 해치는 경우도 많다. 지난해 4월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 입사한 F 씨(24·여)는 반년째 생리를 하지 않고 있다. 새벽에 출근해 10시간 넘게 시달리다가 퇴근하고, 쉬는 날에도 불려나가는 게 일상이 되면서다.

주변에 도움을 청하기도 쉽지 않다. 수간호사나 간호부장 등은 “신입 땐 누구나 혼나기 마련이고 못 버티면 그만두는 게 낫다”는 인식으로 방관하는 일이 많다. 이직을 마음먹는 건 더 어렵다. 태움 탓에 이직했다는 소문이 돌면 “그 정도도 못 견디느냐”며 오히려 피해자를 탓하는 분위기가 있다. 병원을 옮겨도 경력과 상관없이 다시 태움을 당하는 생활이 시작될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태움의 피해자가 점차 자신을 괴롭힌 가해자를 닮아간다. 업무 스트레스를 후배에게 푸는 걸 교육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하는 것이다. 3년 차 간호사 G 씨(29·여)는 “나도 막상 가르치는 입장이 되니 후배를 어느 정도 태워야(괴롭혀야) 더 열심히 배운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 ‘교육 간호사’ 별도로 둬야

정부가 나서 태움을 근절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성희롱처럼 사용자가 방지 조치를 해야 할 의무가 있는 부분이 아닌 한 노동자 간 문제는 근로감독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간호계에선 기존 간호사가 많은 업무를 처리하면서 신입 교육까지 떠맡아야 하는 구조가 태움 악습을 조장한다고 지적한다. 프리셉터는 보통 한꺼번에 11∼13명씩 자기 환자를 돌보면서 후배를 가르치고, 후배가 맡은 환자도 돌봐야 한다. 신입이 업무를 빨리 익히지 못하면 그 책임은 프리셉터에게 돌아가는 구조다.

신입의 교육을 전담하는 ‘교육 간호사’를 따로 두는 병원은 드물다. 교육 간호사를 따로 채용해도 건강보험 수가를 청구하거나 정부 지원금을 받을 수 없다. 간호계에선 교육 간호사를 따로 둘 수 있도록 수가를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한간호협회 윤리위원회에는 지난해 11월 이전까지 태움 관련 신고가 한 건도 접수되지 않았다. 신고 내용을 해당 병원에 통보할 때 신고자의 신원도 함께 넘기기 때문이다. 백찬기 대한간호협회 홍보국장은 “협회 내에 인권센터를 신설해 신고를 상시 접수하고 신고자의 신원을 보호하겠다”고 말했다.

조건희 becom@donga.com·김하경 기자·이진한 의학전문기자·의사
#간호사#태움#언어폭력#병원#직장#왕따#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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