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이슈]환자 앞에서 “머리 ×만 찼나” 폭언…간호사 40% “‘태움’ 경험”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20일 17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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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살리겠다며 나이팅게일 선서를 한 간호사 2명이 연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선배 간호사의 괴롭힘, 이른바 ‘태움’을 견디지 못해서였다. 2005, 2006년의 일이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간호사의 세계는 나아지지 않았다. 대한간호협회가 조사해보니 간호사 10명 중 4명은 지금도 태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15일 한 대형병원 간호사의 자살을 계기로 동아일보가 심층 인터뷰한 전현직 간호사 10명 중 2명은 태움 탓에 한때 자해까지 고민했다고 털어놨다. ‘백의의 천사’들의 마음은 말 그대로 잿더미나 다름없었다. 고질적인 태움문화의 실태를 들여다봤다.》

1년차 간호사 A 씨(24·여)는 19일에도 하루 종일 가시밭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직속 선배(프리셉터)는 A 씨의 사소한 실수를 꼬투리 잡아 “너 머리 안 좋니?”라며 폭언을 퍼붓다가 아예 투명인간 취급을 했다. 퇴근 시간이 진작 지났지만 A 씨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선배가 입을 열 때까지 선배 뒤만 졸졸 따라다녀야 했다. 새벽별을 보고 출근해 결국 달빛을 보며 퇴근한 A 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가끔 출근하다가 차에 치여 입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럼 쉴 수 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 “쉬는 날에도 전화해 다짜고짜 욕설”

설 연휴가 시작된 15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학병원 간호사 B 씨(28·여)가 숨지기 전 선배로부터 지속적으로 ‘태움(괴롭힘)’을 당해왔다는 주장이 나오자 간호계에선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전현직 간호사 10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 가장 흔한 태움의 유형은 폭언이었다. 대한간호협회가 간호사 727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흔한 태움 유형은 △고함과 폭언(62.7%) △험담이나 안 좋은 소문 퍼뜨리기(47%) △비웃음거리로 삼기(44.5%·중복응답) 순이었다.

폭언과 폭행은 주로 근무 교대 시간에 벌어진다. 직속 선배와 직접 대면하는 시간에 교육이란 미명 아래 각종 질책이 쏟아지는 것이다. 간호사실로 불러 혼내는 건 그나마 낫다. 간호사 C 씨(24·여)는 환자 앞에서 선배로부터 “머리에 똥만 찼냐”는 폭언을 들어야 했다. 3년차 간호사 D 씨(33·여)는 서류판으로 머리를 맞은 적도 있다.

퇴근 후에도 태움에서 자유롭지 않다. E 씨(29·여)는 쉬는 날에도 “왜 건강보험을 정확히 청구하지 않았느냐”거나 “기록부가 깔끔하지 않다”는 등 사소한 실수를 지적하는 선배의 전화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다. 선배가 바뀐 근무표를 일부러 전달하지 않아 쉬는 날에 출근한다거나 근무일이 아닌데도 나와서 일손을 보태라고 강요받은 적도 있다.

●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대물림 구조

간호사들 사이에선 작은 실수가 환자의 생명과 직결될 수 있는 업무 특성상 신입을 엄격하게 교육할 수밖에 없다는 반론도 있다. 문제는 수십 년간 지속된 태움 문화가 교육 효과를 높이는 데 방점이 있다기보다 후배에 대한 선배의 갑질로 변질됐다는 점이다. 단순히 괴롭히기 위한 태움이 잦다는 얘기다.

선배의 시범을 한번에 정확하게 따라하지 못하면 질책하는 등 꼬투리 잡기식 교육이 주를 이룬다. 일부 병동에선 새 간호사가 들어와야 기존 간호사가 ‘태움 타깃’에서 벗어난다고 말도 나온다. 의대 교수가 전공의를 폭행하는 의사 사회의 오랜 악습과 닮은꼴이다. 한 원로 간호사는 “최소한 50년 전부터 현장에서 태움이라는 단어가 쓰였다”고 말했다.

지속적인 태움을 견디려다가 몸과 마음을 해치는 경우도 많다. 지난해 4월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 입사한 F 씨(24·여)는 반 년째 생리를 하지 않고 있다. 새벽에 출근해 10시간 넘게 시달리다가 퇴근하고, 쉬는 날에도 불려나가는 게 일상이 되면서다.

주변에 도움을 청하기도 쉽지 않다. 수간호사나 간호부장 등은 “신입 땐 누구나 혼나기 마련이고, 못 버티면 그만두는 게 낫다”는 인식으로 방관하는 일이 많다. 이직을 마음먹는 건 더 어렵다. 태움 탓에 이직했다는 소문이 돌면 “그 정도도 못 견디느냐”며 오히려 피해자를 탓하는 분위기가 있다. 병원을 옮겨도 경력과 상관없이 다시 태움을 당하는 생활이 시작될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태움의 피해자가 점차 자신을 괴롭힌 가해자를 닮아간다. 업무 스트레스를 후배에게 푸는 걸 교육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하는 것이다. 3년차 간호사 G 씨(29·여)는 “나도 막상 가르치는 입장이 되니 후배를 어느 정도 태워야(괴롭혀야) 더 열심히 배운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 ‘교육 간호사’ 별도로 둬야

정부가 나서 태움을 근절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성희롱처럼 사용자가 방지 조치를 해야 할 의무가 있는 부분이 아닌 한 노동자 간 문제는 근로감독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간호계에선 기존 간호사가 많은 업무를 처리하면서 신입 교육까지 떠맡아야 하는 구조가 태움 악습을 조장한다고 지적한다. 프리셉터는 보통 한꺼번에 11~13명씩 자기 환자를 돌보면서 후배를 가르치고, 후배가 맡은 환자도 돌봐야 한다. 신입이 업무를 빨리 익히지 못하면 그 책임은 프리셉터에게 돌아가는 구조다.

신입의 교육을 전담하는 ‘교육 간호사’를 따로 두는 병원은 드물다. 교육 간호사를 따로 채용해도 건강보험 수가를 청구하거나 정부 지원금을 받을 수 없다. 간호계에선 교육 간호사를 따로 둘 수 있도록 수가를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한간호협회 윤리위원회에는 지난해 11월 이전까지 태움 관련 신고가 1건도 접수되지 않았다. 신고 내용을 해당 병원에 통보할 때 신고자의 신원도 함께 넘기기 때문이다. 백찬기 대한간호협회 홍보국장은 “협회 내에 인권센터를 신설해 신고를 상시 접수하고 신고자의 신원을 보호하겠다”고 말했다.

▼심리지원 사각지대에 놓인 간호사

서울 대형병원 간호사의 자살이 간호사들 사이의 고질적 악습인 ‘태움 문화’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간호사를 비롯해 의료계 종사자에 대한 심리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0일 중앙자살예방센터에 따르면 의료인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자살 예방 등 심리지원 사업은 한 건도 없다. 의료인의 자살 실태를 파악한 자료도 전무하다. 경제·사회적 지위가 낮을수록 자살 위험성이 높다는 사회적 통념에 따라 지위가 높다고 여겨지는 의료인에 대해서는 별도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의료인은 심리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체로 인식되는 점도 심리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유다. 전명숙 보건복지부 자살예방정책과장은 “외국에도 의료인에 초점을 둔 프로그램은 없다”고 말했다.

자체 상담소를 운영하는 병원도 찾아보기 힘들다. 의료인을 위해 병원 내에 심리지원 기능을 담당하는 부서를 설치한 곳은 서울대병원 등 극소수의 대형병원뿐이다. 이나미 서울대병원 인권센터장(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은 “지속적으로 감정노동과 육체노동을 하다 보면 지치고 힘든 마음을 동료를 향한 폭언이나 폭행으로 풀 가능성이 있다”며 “의료인 심리지원과 함께 의료계의 저비용 고강도 근로환경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간호사들의 고통 외면하지 말아주세요”…靑 국민청원 2만 명 참여▼

간호사 사이의 고질적 악습인 ‘태움 문화’가 알려지면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태움 근절을 위한 서명이 빠르게 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님 간호사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주세요’라는 제목의 국민청원은 18일 게시됐다. 20일까지 2만여 명이 청원에 참여했다. 해당 글 외에도 18일 이후 태움과 관련된 또다른 청원 글은 10여 건 더 올라왔고 3400여 명이 참여한 상태다. 체육대회때 간호사들에게 야한 춤을 강요한 한림대 성심병원 사건이 불거진 뒤 지난해 11월 게시됐던 ‘[도와주세요] “간호사, 의료인인가요? 하인인가요?” <전국 간호사 처우개선 청원>’제목의 국민청원에도 태움 문화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청원에도 한 달 동안 5만8470명의 국민이 참여했다.

대한간호협회가 지난해 12월 28일부터 지난달 23일까지 ‘간호사 인권침해 실태조사’에 참여한 간호사 7275명의 응답을 분석한 결과, 지난 12개월 새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했다는 비율은 40.9%였다. 가해자는 직속상관(프리셉터)이 30.2%로 가장 많았고, 동료간호사 27.1%, 간호부서장이 13.3%, 의사 8.3% 순이었다. 대한간호협회 관계자는 “실태조사 기간동안 실명을 밝힌 신고도 130여 건이 접수돼 고용노동부에 실사 의뢰를 한 상태”라고 밝혔다.

김하경기자 whats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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