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여관 방화 사건’ 참변 세모녀, 여행비 아끼려 가장 싼 숙소 찾았는데…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1일 20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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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화재 현장에 놓인 추모 국화.
종로 화재 현장에 놓인 추모 국화.
A 씨(35)와 두 딸(15, 12세)이 서울 종로구 서울장여관에 묵은 건 19일 오후였다. 이날은 세 모녀 여행일정의 5일째였다. 15일 전남 장흥의 집을 떠났다. 수도권과 서울 등을 둘러본 뒤 21일 귀가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참변에 결국 세 모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됐다.

가정형편은 넉넉지 않았다. A 씨와 남편(40)은 혼인신고만 하고 결혼식도 미처 올리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3월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생활비 긴급지원을 신청하기도 했다. 형편은 어려웠지만 가족 사랑은 각별했다. 이번에도 겨울방학을 맞은 아이들에게 소중한 추억을 안겨주기 위해 A 씨가 아이들을 데리고 출발했다. 남편은 “생활비를 벌겠다”며 함께하지 못했다.

세 모녀도 여행비를 아끼기 위해 가장 싼 숙소를 찾았다. 그렇게 찾은 곳이 불이 난 여관이었다. 한 주민은 “세 모녀 소식을 듣고 너무 안쓰러워 지인들이 얘기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흥군은 A 씨 가족에 대한 긴급지원을 준비하는 한편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돕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서울장여관의 하루 숙박비는 2만~3만 원 수준이다. 1개월 이상 숙박하는 ‘달방’을 계약하면 하루 1만5000원 정도다. 중상을 입고 치료 중 21일 오후 숨진 김모 씨(54)는 종로의 한 시장에서 퀵서비스 일을 하는 가장이다. 지병으로 입원했다가 건강을 회복해 지난해 12월 말부터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인천에 집이 있지만 따로 볼 일이 있어 잠시 여관에 머물던 중이었다. 김 씨의 유가족은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끝내 김 씨가 숨지자 “팔순 넘은 노모와 시집도 안 간 두 딸은 어떻게 하느냐”며 오열했다.

주로 일용직 근로자였던 장기 투숙객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의류업체에서 일하는 최모 씨(52)는 화재 당시 2층에서 뛰어내려 다행히 가벼운 부상에 그쳤다. 3개월가량 여관에 머물렀다는 최 씨는 “회사에 가려고 일찌감치 일어났었다. 덕분에 불이 난 걸 알고 재빨리 대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건물 맨 안쪽 방에 있다가 살아난 박모 씨(58)는 약 3년간 여관에 투숙 중이다. 그는 종로의 한 양복점에서 옷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그때그때 일감이 있으면 돈을 버는 일이다. 수입이 일정치 않다보니 한 푼이라도 싼 숙소를 찾아 이곳에 머물고 있다.

한 부상자 가족은 “상태가 좋지 않아 아직도 마음이 불안하다. 연기를 많이 마신 일부 부상자는 뇌 손상도 우려된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장흥=이형주기자 peneye09@donga.com
김은지기자 eun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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