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용]뉴요커가 재난에 대처하는 자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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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 뉴욕특파원
박용 뉴욕특파원
10월 말 퇴근길에 ‘사고철’로 악명이 높은 미국 뉴욕 지하철 사고를 처음 겪었다. 맨해튼에서 F라인 지하철을 타고 렉싱턴 63번가 역에 다 왔을 때 객차 안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심하게 났다. 열차가 승강장에 도착했을 땐 고무 타는 듯한 역겨운 냄새가 스멀스멀 났다. 한참 뒤 열차 문이 열리자 타는 냄새와 흰 연기가 확 밀려들었다. 잠시 후 “즉시 열차 밖으로 나오라”는 다급한 안내방송이 나왔다. 승객들은 그제야 열차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좁은 승강장은 탈출한 승객들로 혼잡했다. 누군가 세게 밀면 곧장 넘어지거나 승강장 밖으로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시민들은 혼란 속에서도 침착했다. 매캐한 연기와 냄새가 짙어지는데도 먼저 나가겠다고 밀치거나 고함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앞사람의 등에 손을 대고 조금씩 입구를 향해 움직일 뿐이었다.

대피 인파가 계단 앞에서 정체되자 옆사람과 뒷사람의 손에 약간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잠시 후 옆에 있던 젊은 여성이 “미안하다”며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이런 사고를 처음 당해 너무 놀라서 밀었던 것 같은데 이해해 달라”고 사과했다. 그녀가 밀었다는 걸 느끼기는커녕 옆에 있는 줄도 몰랐는데 사과라니. ‘이 사람들, 위기 상황에서 너무 느긋한 게 아니냐’며 투덜거렸던 게 부끄러웠다.

개통한 지 100년이 넘은 뉴욕 지하철은 24시간 운행하며 하루 600만 명을 실어 나른다. 1937년 설치된 신호시스템, 40년 넘은 낡은 객차로 뉴욕 지하철이 고장과 사고를 자주 일으키자 앤드루 쿠오모 뉴욕 주지사는 올해 6월 말 비상사태를 선포하기도 했다. 이날 사고도 낡은 객차에서 발생한 화재가 원인이었다. 다행히 다친 사람도 없는 작은 사고였지만 낡고 불안한 뉴욕 지하철을 그나마 안전하게 만드는 게 뉴요커들의 시민정신이라는 걸 느끼기엔 충분했다.

승강장을 거의 다 빠져나왔을 때 뉴욕 소방관들이 우르르 내려오는 게 보였다. 악명 높은 맨해튼의 퇴근길 교통정체를 뚫고 소방관들이 신속하게 출동해 화재 수습에 나선 것이다. 역 주변 사거리는 이미 경찰과 소방관들로 완벽하게 통제돼 있었다. 시민들이 사고에 그처럼 침착하게 대응한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시민을 보호하는 정부와 사회시스템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달 2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뉴욕 사저를 방문했을 때 맨해튼 주요 도로가 통제됐다. 뉴욕 경찰관이 “대통령이 지나갈 때까지 길을 통제한다. 30분 정도 기다려 달라”고 설명하자, 한 노신사는 “매우 중요한 일(Very Important)”이라며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경찰이 설치한 통제선에 둘러싸여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시민 중 항의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민주당 텃밭인 뉴욕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인기는 바닥이지만, 정부를 대표하는 대통령 직책에 대한 존경심은 크게 퇴색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웃을 배려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려는 뉴요커의 시민정신은 재난, 테러와 같은 위기 때 특히 돋보인다. 10월 31일 맨해튼 차량 테러 당일, 시 당국은 테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해 예정된 핼러윈데이 퍼레이드를 강행했다. 시민들은 공권력을 믿고 거리로 나와 이웃들과 함께 행진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경쟁사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을 밑도는 정부 신뢰도와 137개국 중 90위(세계경제포럼 2017년 국제경쟁력지수)에 불과한 정치인 신뢰도를 가진 한국에선 어떨까. 이웃에 대한 배려와 공동체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국가 경쟁력도, 위기 극복도 어렵다. 역대 정권이 말만 하고 풀지 못한 해묵은 과제다.

박용 뉴욕특파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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