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학기 수업 필기 5000원에 사고팝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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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생 11월 필기거래소 개설… SNS 통해 수요-공급자 중개
기말고사 앞두고 이용자 크게 늘어… “쉽고 저렴하게 구할수 있어 좋아”
“수업 안듣고 돈으로 해결” 비판도

얼마 전 서울대 3학년 한모 씨(21·여)는 귀한 자료를 구했다. 전공과목 강의 내용을 꼼꼼히 필기한 5쪽짜리 한글 문서 파일이다. 지난해 같은 수업을 듣고 A+ 학점을 받은 학생의 ‘고퀄’(품질이 높다는 뜻의 ‘고퀄리티’ 줄임말) 필기였다. 독감 탓에 4차례나 수업을 빠졌던 한 씨에게는 동아줄과 다름없었다.

한 씨에게 필기자료를 건넨 건 친구나 선배가 아니다. 그는 이른바 ‘필기거래소’를 통해 3000원을 주고 자료를 구입했다. 한 씨는 “친구도 없이 혼자 듣는 수업을 빠져 걱정했는데 커피 한 잔 가격에 필기를 살 수 있다는 광고를 보고 구입했다”고 말했다.

‘수업시간에 졸아 필기가 필요한 당신, 영혼을 담은 필기를 썩히고 있는 당신, 대학생의 필기거래소가 도와드릴게요.’

한 씨가 접한 필기거래 서비스의 홍보 내용이다. 이 서비스는 지난달 26일 시작됐다. 일부 서울대생이 수업 중 아이디어를 내서 진행한 프로젝트다. 필기자료를 구하려는 수요자와 이를 제공하려는 공급자를 연결해 주는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중개된다. 3000∼5000원에 중간·기말고사 혹은 학기 전체 분량의 필기 자료를 사고팔 수 있다. 거래 자료에는 해당 과목의 기본 현황뿐 아니라 필기한 사람의 학점과 사용 팁까지 친절하게 적혀 있다. 1, 2쪽 분량의 ‘미리보기’도 제공된다.

이 서비스를 고안한 서울대생 A 씨는 “친한 선후배끼리만 알음알음 필기를 공유하는 상황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누구든지 좋은 필기를 볼 수 있게 하자는 생각에 아이디어를 냈다”고 말했다. 필기거래 서비스는 기말고사가 끝나는 13일 종료될 예정이다.

친구나 선후배끼리 이른바 ‘족보’로 불리는 필기자료를 주고받는 건 대학가의 오랜 전통이다. 과거에는 족보를 거래가 아닌 공유의 대상으로 여겼다. 하지만 취업난이 심해지고 학점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족보 공유는 옛 문화가 됐다. 복수전공 확대 등으로 친구와 떨어져 혼자 강의를 듣는 학생이 많아지고 필기자료를 개인의 저작물로 보는 시선도 영향을 미쳤다.

이미 대학 게시판 등을 통한 필기자료 거래는 활발하다. 서울대에 등장한 필기거래소는 마치 주식처럼 이를 공개한 것이다. 학생들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지금까지 100명 가까운 학생들이 이 서비스를 통해 필기자료를 구입했다. 1학년 김모 씨(20)는 “저렴한 가격에 아쉬운 소리 없이 ‘A+ 필기’를 구입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평가했다.

친분으로 암암리에 필기를 주고받는 관행보다 일정 가격만 지불하면 누구나 얻을 수 있어 합리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강모 씨(27·여)는 “복수전공생이라 다른 학과 전공수업을 많이 들었는데 소수끼리 족보나 필기를 돌려보는 문화가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서비스가 활성화되면 누구나 평등하게 양질의 필기를 확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비판과 우려도 있다. 양모 씨(24)는 “강의 내용을 놓치지 않으려고 힘들어도 매주 출석하려 하는데 그 시간에 대한 노력을 단돈 몇천 원에 살 수 있다는 게 씁쓸하다”고 말했다. 저작권 문제를 지적하는 의견도 있다. 강의 내용을 토대로 만들어진 필기자료는 해당 교수의 2차 저작물이라는 것. 교수 동의 없이 필기를 거래하거나 공유하는 행위는 저작권 침해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 자신의 강의내용 필기자료가 거래된다는 걸 알게 된 교수들은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한 교수는 “아무도 (나에게) 동의를 구한 적 없다. 후배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필기를 주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사고파는 행위라면 문제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비스 운영자는 “필기자료는 학생의 노력과 가공이 들어갔기에 1차 저작권은 학생에게 있다고 봐야 한다는 얘기를 법률 자문을 통해 들었다”고 말했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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