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철희]김정은의 ‘마지막 자존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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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논설위원
이철희 논설위원
1990년 9월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교장관은 이틀간 북한 방문을 마치고 떠나는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내 평생 가장 끔찍했던 경험”이라며 치를 떨었다. 한소 수교를 앞두고 김일성 주석에게 소련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방북한 그는 김일성을 만나지도 못한 채 김영남 외교부장에게서 소련의 배신에 대한 격렬한 비난과 함께 북한도 핵개발을 하겠다는 협박 성명만 듣고 돌아와야 했다.

치욕스러운 방북에 따른 불쾌감 때문이었을까. 얼마 뒤 셰바르드나제는 한소 수교를 앞당기자는 한국 측 제안을 곧바로 수락한 뒤 공동발표회장에서 펜을 꺼내 준비된 발표문에 명시된 정식 수교일에 줄을 긋고 3개월 앞당긴 날짜를 적어 넣었다. 그러면서 수행원들이 다 들을 만한 목소리로 “이것으로 북한 친구들도 정신을 차리겠지”라고 중얼거렸다.


“황제 칙사 박대한 ×배짱”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과의 관계를 이렇게 끝낸 김일성이지만 2년 뒤 똑같은 목적으로 방문한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에겐 훨씬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다. 전례 없이 짧았지만 만남 자체를 거부하진 않았다. 한중 수교를 추진할 수밖에 없다는 장쩌민 주석의 구두메시지를 전해 들은 김일성은 “우리는 자주노선을 걷겠다”고 짤막하게 통고했다.

그제 김정은이 시진핑 주석의 특사 쑹타오를 만나주지 않은 것을 두고 한 북한 연구자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놀랐다. 시진핑이 누구냐. 당 대회를 통해 사실상 황제급에 등극한 최고지도자 아니냐. 황제의 칙서까지 직접 수령을 거부하다니 일단 그 ×배짱은 대단하다.” 무슨 시대착오적 해석이냐고 웃어넘길 수만은 없다. 어느 시대, 어떤 관계에서나 가장 중요한 것은 힘의 우열이고, 그 어디보다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게 국제정치 현장이다.

이런 현실에서 김정은의 배짱 또는 건방은 어디에서 왔을까. 김정은의 특사 면담 거부는 핵무력의 완성, 즉 핵탄두를 실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완성은 결코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분명한 메시지일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김일성의 불가피한 선택이 핵무기 개발이었다면, 손자 김정은에겐 ICBM 완성이기 때문이다.

2011년 말 권좌에 오른 김정은이 가장 먼저 내린 결단은 이듬해 북-미 간 ‘2·29합의’의 파기였다. 대북 영양 공급과 북핵·미사일 활동 중단을 맞바꾼 2·29합의는 북한이 유례없이 신속하게 움직이면서 이뤄진 합의였다. 김정은은 아버지 사망 직후 떼밀리듯 합의를 승인했을 테지만 불과 보름 만에 ‘인공위성’ 발사를 결정함으로써 합의문을 찢어버렸다.

그게 대포든, 미사일이든, 인공위성이든 ‘쏘아 올리는 것’은 김정은의 후계 정통성과 직결된 사안이다. 실제로 김정은이 2010년 9월 ‘인민군 대장’ 칭호를 받으며 공식 후계자로 등극한 이래 북한은 그가 김일성군사종합대 포병병과 출신임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2개월 뒤 대남 조준사격을 감행한 연평도 포격도발도 바로 청년대장의 작품이라는 게 정설이다.

중국은 오히려 홀가분하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초강경 드라이브와 김정은의 비타협적 핵폭주가 맞부딪치면서 한반도는 다시 아슬아슬한 긴장에 빠질 수 있다. 그러니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대화 국면을 손꼽아 기다려온 우리나라다. 당장 평창 겨울올림픽을 두 달 반 앞두고 안보태세 관리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판이다.

중국은 비록 김정은의 무례에 불쾌했겠지만 오히려 홀가분해졌을 수 있다. 사실 김정은의 마지막 자존심을 세워준 만큼 부담을 덜고 한결 자유롭게 됐기 때문이다. 마치 이별 통보를 하자 ‘내가 걷어찬 걸로 하자’는 애인에겐 오만 정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북한 김정은#김정은 특사 면담 거부#도널드 트럼프 대북 초강경 드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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