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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공주 정지산 유적, 백제 무령왕의 빈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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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공주 정지산 유적, 백제 무령왕의 빈전 아니다”

김상운 기자 입력 2017-11-21 03:00수정 2017-11-2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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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호 관장 최근 논문서 주장
충남 공주시 정지산 유적 내 기와건물터([1]). 이곳에서 출토된 연화문와당([2])과 부여 동남리 절터에서 나온 연화문와당([3])이 한 거푸집에서 만들어진 ‘동범품’이라는 주장이 최근 제기됐다. 이는 정지산을 빈전으로 본 기존 학설과 배치되는 주장이다. 동아일보DB·이병호 관장 제공
‘공주 정지산 유적’(사적 제474호)은 백제 무령왕 부부의 빈전(殯殿·시신을 입관한 뒤 매장하기 전까지 안치하는 곳)이 아니라는 주장이 새로 제기됐다. 정지산 유적은 1996년 국립공주박물관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 빈전으로 추정돼 국가사적으로 승격됐다.

이병호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장은 최근 발표한 ‘백제 왕실의 조상 제사 변천에 대한 시론’ 논문에서 “정지산 유적과 부여 동남리 절터(사지·寺址), 청양 관현리 기와가마터의 연화문와당(蓮花紋瓦當)은 문양, 제작 기법, 원료에서 서로 일치한다”며 “모두 관현리 가마에서 생산된 동범품(같은 거푸집으로 찍어낸 것)”이라고 밝혔다.

동남리 절터가 538년 사비 천도 이후 세워진 사찰임을 감안하면 정지산 유적 내 빈전으로 추정되는 기와 건물이 적어도 6세기 후반까지 존속한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무령왕과 왕비가 각각 사망한 시점인 523년, 526년 이후에도 빈전이 오랫동안 유지된 셈이다.

이는 정지산 유적에서 주춧돌이나 적심(積心·기둥을 올리기 위해 밑바닥에 까는 돌)이 발견되지 않은 사실을 근거로, 빈전은 거주 목적이 아닌 이상 영구적인 성격의 건물이 아니라고 본 기존 견해와 배치된다.

앞서 고(故) 이남석 공주대 교수는 정지산 유적에서 백제 말기에 지어진 걸로 보이는 소형 무덤 3기가 발견된 사실에 주목해 빈전설을 비판했다. 왕의 빈전이 설치된 신성한 공간에 일반인의 무덤이 들어서는 건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봤다. 이 관장은 “왕궁(공산성)에서 정지산으로 그리고 다시 무령왕릉으로 두 번이나 옮겨진 것치고는 무령왕 부부의 목관 상태가 비교적 온전한 것도 빈전설을 의심케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지산 유적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 관장은 조망에 유리한 정지산 유적의 입지나 건물 배치가 부여 청산성 유적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군사시설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빈전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중국 사서인 수서(隋書) 등에 고구려와 백제는 3년, 신라는 1년에 걸쳐 빈장을 치른 걸로 기록된 사실을 강조한다. 수서 고구려조에는 “사람이 죽으면 옥내에서 빈(殯)을 치르고 3년이 지나면 길일을 택해 매장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특히 “526년 12월 서쪽 땅(酉地)에서 무령왕비의 장례를 치르고 529년 2월 12일 다시 대묘로 옮겨 장사를 지냈다”는 무령왕릉 지석(誌石·죽은 이의 인적사항 등을 기록한 판석) 명문에 의미를 부여한다. 백제 웅진(현 공주) 시대 왕궁인 공산성을 기준으로 지석이 가리키는 방향(서쪽)에 정지산 유적이 있다는 것이다. 무령왕릉 지석에는 삼국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묻힌 사람의 이름과 사망일이 적시돼 있다.

정지산 유적을 발굴한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유구에서 출토된 유물을 면밀히 따져볼 때 정지산 유적을 사비 천도 이후로 보기는 힘들다”며 “설사 동남리 절터 기와와 동범품이라고 쳐도 백제 성왕이 천도한 뒤 선왕을 추모하기 위해 웅진을 찾은 만큼 빈전을 일정 기간 유지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공주 정지산 유적#백제 무령왕 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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