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활동비 칼바람 부른 ‘이헌수 리스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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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국정원 특수활동비 일파만파

국가정보원의 ‘꼬리표 없는 돈’이 대한민국을 다시 한번 요동치게 하고 있다. 진원지는 이헌수 전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64)의 입이다. “5만 원권 현금 다발을 검은 007가방에 넣어 전달했다”는 그의 말에 ‘박근혜 청와대’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검찰의 융단폭격을 받고 있다.

국정 농단 사건으로 재판 중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다시 수사 대상에 올랐고, 문고리 권력인 안봉근 이재만 전 비서관이 구속 수감됐다. 조윤선 현기환 전 대통령정무수석이 다시 수사선상에 오르더니 남재준 이병기 이병호 전 국정원장의 동시 수사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수사 중인 검찰은 이제 친박(친박근혜)계 좌장인 최경환 의원을 넘어 정치권 전체를 겨누고 있다.

이 전 실장은 올해 9월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부장 양석조)의 이른바 ‘화이트리스트 사건’(박근혜 정부가 대기업에 보수단체를 지원하라고 압박한 사건) 수사 때부터 본격적인 조사를 받았다. 검찰은 앞서 국정원 기조실 산하 예산처 직원들이 거액의 특수활동비 뭉칫돈을 이 전 실장에게 전달한 금전 출입금 명세를 모두 확보했다. 이를테면 ‘○○○○년 ○월 ○일 ○억 원이 실장에게 전달’과 같은 내용이다.

통상적이라면 이 같은 기록이 수사기관으로 넘어갈 리가 없지만, 이번에는 국정원이 자체적인 적폐청산 TF를 가동하고 있어서 해당 직원의 진술과 기록 등이 모두 검찰에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 예산처 직원들도 “이 전 실장 지시로 현금을 전달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그동안 수사의 성역이던 국정원 특수활동비 계좌도 검찰이 추적해 입출금 근거 자료를 확보한 데 이어 이 전 실장의 휴대전화 통화 기록 등과 대조해 추궁의 근거까지 손에 넣었다. 최 의원이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맡고 있던 2014년 10월 1억 원을 줬다는 이병기 전 원장의 자수서에 ‘국정원 인출 계좌’를 증빙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통상 검찰이 기업체의 로비자금 수사 때 자금 담당 임원의 비밀장부를 손에 넣으면 수사의 8분 능선을 넘어섰다고 하는데, 이번 국정원 수사가 그렇다.

검찰 안팎에선 이 전 실장이 국정원 특수활동비의 사용처를 낱낱이 진술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변호인이 화끈하게 협조하라고 이 전 실장을 설득한 것 같다”고 말했다.

▼ ‘○○년 ○월○일 ○억’ 명시… 檢, 자금담당 비밀장부 확보한 셈 ▼

이헌수 전 실장으로서는 날짜까지 명확하게 드러난 돈의 사용처를 진술하지 않으면 본인이 그 돈을 유용한 것으로 되기 때문에 돈의 사용처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게 됐다는 것이다. 단순히 명단만 건네는 수준이 아니라 구체적인 전달 경위에 대한 추가 조사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6일 전직 국정원장 3명의 영장실질심사 때는 한 원장 측이 “수사의 순서상 이 전 실장을 먼저 구속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따지는 일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전 실장이 “청와대 활동비가 부족하니 국정원장 특별사업비에서 집행하자”는 아이디어를 내서 촉발된 사건인데, 혼자만 구속을 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19일 딸 결혼식을 앞둔 이 전 실장이 시한부 불구속 수사를 조건으로 검찰이 원하는 진술을 하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일종의 ‘플리바기닝’(피의자가 유죄를 인정하거나 다른 사람의 범죄에 대해 진술하는 대가로 형량을 조정해 주는 제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검찰 고위직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이 전 실장이 금품 수수자 명단을 진술했다고 하더라도 통상적인 사건과 달리 수사팀에서 이 전 실장을 보호하려는 것 같지도 않다”고 했다. 검찰은 뇌물공여 협조자의 진술을 끝까지 감추는 사례가 많은데, 이번에는 이 전 실장의 진술이 수사 출발점이라는 점이 릴레이 중계되는 등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국정원 일각에선 이 전 실장의 적극적인 진술에 고개를 갸웃하는 분위기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전 실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 김만복 전 국정원장이 기조실장을 할 때 바로 아래 예산관을 맡았다. 당시 부하 직원의 수의계약 건이 문제가 되면서 이명박 정부의 원세훈 국정원장 때 감찰 조사를 받았는데, 감찰 직후 이 전 실장은 “부하한테 책임을 묻지 마라. 내가 안고 가겠다”며 즉각 사표를 냈다고 한다. 그랬던 이 전 실장의 수사 협조를 놓고 검찰 안팎에서는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예를 들면 특수활동비 일부를 개인적으로 유용했거나, 또 다른 사건으로 수사팀에 약점을 잡힌 게 아니냐는 것.

국정원 공채 출신인 이 전 실장은 3급 때까지는 국정원 내부의 예산 및 재정 관련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친구가 운영하는 회사의 대표로 있던 그는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 기조실장으로 발탁됐다. 안봉근 전 비서관과의 친분 외에 구체적인 발탁 경위는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다. 국정원 기조실장은 국정원의 예산과 인사 등을 관장하는 요직으로, 특히 정권 출범 직후 첫 번째 임명된 기조실장은 대통령과 가까운 인사들이 주로 맡아 왔다. 김대중 정부의 이강래, 노무현 정부의 서동만, 이명박 정부의 김주성 전 기조실장이 대표적이다. 이 전 실장은 박근혜 정부 4년 내내 요직을 지켰다.

그뿐만 아니라 이 전 실장은 과거 정부보다 더 큰 권한을 부여받았다. 남재준 전 원장이 “정치적인 오해를 받기 싫다”며 국내 담당 차장인 2차장의 권한이던 국회처(국회 담당), 준법통제처(업무의 준법성 여부를 판단하는 부서) 등 핵심 부서의 권한을 모두 기조실장에게 몰아준 것이다. 이 전 실장은 청와대 관계자와 장차관급 고위 공무원, 국회의원 등 정치권 실세들은 물론이고 기업체 고위 임원들과도 직접 마주하게 됐다. 내부에서 “국내 담당 2차장보다 ‘핫라인’이 더 많다”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영수증이 필요 없는 매년 5000억 원 규모의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전한 돈’의 결재권도 그의 손에 있었다.

황형준 constant25@donga.com·장관석·박훈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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