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진]‘어묵 젠트리피케이션’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20일 03시 00분


코멘트
1960년대까지 슬럼가였던 서울시청 앞 소공동이 현재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된 계기는 1966년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의 방한이었다. 시청 앞 환영행사를 중계하던 TV 카메라가 소공동을 비추자 서울의 속살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TV 중계를 본 미국 교민들이 창피해서 못 살겠다고 탄원서를 올리면서 한국 최초의 도심 재개발이 착수됐다. 하지만 대를 이어 중국집 등을 운영하던 화교들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낙후된 곳을 개발하면 원주민이 싼 거주지로 옮겨야 하는 일은 세계적 현상이다. 6월 ‘불지옥(inferno)’으로 불릴 정도로 대형 화재가 일어났던 영국 런던 그렌펠타워는 중동 출신 가난한 이주자들의 게토(ghetto)였다. 독일 베를린 역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벌금을 물리는 등의 방법으로 임대료 인상을 억누르고 있지만 주택 공급 부족이 해소되지 않는 한 임시조치일 뿐이다. 임대료 인상과 원주민 이주는 개발이 낳은 이란성 쌍둥이라고 하겠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은 영국 사회학자 루스 글래스가 1964년 런던 서부 주거지역이 재개발되면서 중산층이 들어와 저소득층을 몰아내는 현상을 정의한 용어다. 중산층을 지주계급인 젠트리(gentry)로 보고 지주계급과 하층계급의 주거 갈등구도를 설정한 것은 글래스가 마르크스주의자였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국립국어원은 ‘둥지 내몰림’이라고 순화했다. 원주민이 쫓겨나든, 영세상인들이 몰려나든, 가난한 예술인들이 떠나든 젠트리피케이션은 사람의 온기와 골목의 정겨움까지 사라지게 한다.

▷3년 전 코레일유통과 매출액의 25%를 임차료로 내기로 계약하고 부산역 2층에 입점했던 삼진어묵이 철수했다. 목표매출액의 90%를 ‘최저하한매출액’으로 정해놓고 어묵이 안 팔려도 이를 기준으로 삼아 임차료를 낸다는 계약이 문제였다. 재계약 과정에서 코레일유통이 목표매출액을 2억 원에서 12억8000만 원으로 크게 높이자 아무리 장사가 안 돼도 월 임차료는 2억8800만 원을 내야 하는 삼진어묵이 손을 들었다. 이 정도면 누구라도 손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진 논설위원 leej@donga.com
#어묵 젠트리피케이션#둥지 내몰림#부산역 삼진어묵#하층계급 몰아내기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